UPDATED. 2024-04-18 18:05 (목)
[칼럼비평] 신문사 주장 반복하는 나팔수 '글쓰기'
[칼럼비평] 신문사 주장 반복하는 나팔수 '글쓰기'
  • 김창룡 인제대
  • 승인 2005.04.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창룡 / 인제대 언론정보학부 ©
신문에서 칼럼은 ‘기사의 꽃’이다. 기명으로 고정된 칼럼을 맡고 있다는 것은 전문적 식견과 대중적 인기, 논리적이며 매력적인 글쓰기로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칼럼니스트 한 사람의 글을 보기 위해 신문을 정기구독한다는 독자들이 있을 만큼 칼럼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칼럼니스트의 다수가 이 사회 지식인의 표상으로 알려진 교수들이 손꼽히며 어느 나라보다 교수들의 칼럼이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일반화 된 곳이 한국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교수의 글은 학자적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치밀하게 전문가적 식견을 내놓는 것으로 일반 독자들은 믿는다. 특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민감하고 중대한 사안에 대해 교수들의 칼럼을 통한 자기주장은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예외도 많지만 보편적으로 교수의 글은 일반 기자들의 사실위주의 객관보도와는 대조적으로 전문분야의 정보와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적절한 사례제시로 호응도가 높은 편이다. 문제는 이러한 교수의 칼럼이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특정 언론사의 특정 주장이나 여론몰이에 악용될 때 독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점이다. 신문사의 경우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사설란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주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사설란과는 별도로 칼럼을 배치시키는 행태를 보인다. 칼럼조차 부족하다고 판단할 경우 기획시리즈로 준비하기도 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거론했을 때 조선일보는 4월6일자 ‘쟁점’을 통해 이수훈 경남대 교수와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의 찬반양론을 균형있게 보도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 날자 사설을 통해 ‘한·중 군사협력, '균형자 역할' 시동인가’라는 제목으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어서 조선은 논설주간 ‘강천석 칼럼’을 통해 ‘동북아 균형자론의 꿈과 현실’(4/15)을 통해 노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부정했다. 신문의 논조가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 반대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 기획시리즈를 통해 교수들의 글로 조선일보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하는 모양새에 문제가 없느냐는 것이다.

조선은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기획시리즈 첫 회에 “100년 전엔 역사의 낙오자였지만 이젠 대립 조정할 소프트파워 보유”라며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의 글을 특별기고형태로 실어준 뒤 두 번째 회부터 공격에 들어갔다. 정종욱 아주대 석좌교수와의 일문일답형식으로 ‘비현실적 모험이다’라는 주장을 보도했다. 이어서 자사 특파원을 통해 ‘미전문가들 견해’라며 비판일변도로 보도했다. 제목에서부터 "한국, 강해졌어도 동맹 소중함 알아야", “동맹에 대한 의지없이 안보 확실히 못해” "미국은 한국이 동맹서 빠진다고 생각할 것" 등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입장만 전달했다. 이후 조선은 ‘정치학회 특별 학술회의서도 격론’ 등으로 이어갔지만 외형적 균형성과는 달리 교묘한 구성과 편집으로 자기주장에 학자들을 이용했다.

보다 노골적인 행태도 나타난다. 친일청산과 관련하여 불편한 입장인 동아일보의 경우 3월30일자 사설 ‘친일청산 굿판 거부한 연세대 학생회’라는 제목에서 “어느 한 시기, 한 면만 강조하여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인민재판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동아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며 형식이다. 문제는 이 사설이 나간 뒤 이틀만인 4월1일자 ‘시론’을 통해 이번에는 교수가 아닌 소설가를 등장시켜 ‘親日명단을 여론조사해 만드나’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했다. 이 소설가는 동아의 사설보다 한발 더 나아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피의자들은 모두 재판을 받았다...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은 단죄되었다... 그 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북한의 첩자들로 밝혀졌다”라는 소설가다운 주장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칼럼란을 제공했다.

중앙일보나 한겨레신문 등도 자기 신문의 주장을 강화하고 특정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교수의 칼럼을 이용하는 편이며 이러한 현상은 한국 언론계 보편적 관행으로 굳어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행태는 각 신문사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고 고유한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또한 쟁점에 대한 분명한 자기주장과 입장을 나타낸다는 차원에서 언론사 입장에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칼럼을 작성하는 지식인과 이를 소비하는 독자들에게 나타난다. 행정수도이전 문제나 과거사법, 대통령 탄핵 등 굵직굵직한 국가대사가 터져 나올 때 신문사의 논조에 따라 교수들조차 줄서기에 편입되며 사회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에 종속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제공하기는커녕 신문시장을 지배하는 일부 신문사들의 논조에 동원돼 소수의 목소리를 압도하게 되고 독자들은 일방적 주장에 노출되게 된다는 점이다.

학자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런 시각에 맞춰 특정 언론사가 칼럼의 형태로 기고를 받거나 특정 교수만 인터뷰하는 것을 탓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학자 등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전문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하는 자기반성 부분이다. 혹시 교수의 칼럼이 자기의도와는 다르게 특정 언론사의 자기보호를 위한 빗나간 논리구조에 악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비판과 절제가 항상 필요한 법이다. 이것이 교수를 믿는 독자들의 신뢰를 져버리지 않는 지식인의 절대 의무조항이 돼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