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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_비코연구 현황을 통해 본 인문학 현실
학이사_비코연구 현황을 통해 본 인문학 현실
  • 조한욱 한국교원대
  • 승인 2005.04.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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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 주 이탈리아 한국 대사관에서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그곳 로마대학에서 한국학을 담당하는 교수한테 전갈을 받았다는데, 한국의 비코 연구자를 초청하려고 내게 연락을 취하려 해도 되지 않으니 다리를 놔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로마대학의 교수와 직접 이메일로 교신한 결과, 나폴리에 있는 ‘비코연구소’에서 내게 발표를 청탁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제적인 비코 연구소는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미국 애틀랜타의 에모리 대학교에 있고, 다른 하나는 비코의 출생지인 나폴리에 있다. 두 연구소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탈리아 철학자인 잠바티스타 비코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때로는 공동으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어 비코 연구자들을 전 세계에서 끌어 모은다. 1968년 비코 탄생 3백주년을 기념하는 비코 심포지엄이 대성공을 거둔 이래, 비코와 인문학 다양한 분야의 관계를 밝히는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 비코와 마르크스의 관련성, 비코와 제임스 조이스의 관련성 등등을 다루는 학술대회가 열려 알찬 성과를 남겼다.

내가 초청을 받은 연유는 올해 11월 나폴리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의 주제가 ‘비코와 동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17~18세기 유럽에 투영된 동양과 비코의 저작 속에 나오는 동양에 대한 묘사를 주제로 한 ‘비코의 동양’, 동양 여러 나라에서 비코 연구의 현황을 밝히거나 동양 철학을 통해 본 비코를 새롭게 조명하는 방식을 주제로 한 ‘동양 속의 비코’, 동서양의 관련성에 대해 비코가 제기한 시사점을 다루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비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코를 동양 언어로 번역하는 문제를 다루는 등 네 개의 소주제로 나뉘었다.

1990년에 나는 미국의 비코 연구소에서 나오는 New Vico Studies 라는 학술지에 ‘한국의 비코연구현황’이라는 짧은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주최 측에서 그것을 기억했는지 ‘한국 비코연구의 역사와 현황’이라는 제목으로 30분 정도에 걸쳐 발표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원고를 6월 말까지 제출해달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난 15년 동안 변모된 한국 비코 연구의 진척 상황일 것이다.
그들의 요청을 수락한 뒤 내가 한 일은 당연히 비코에 대해 발표된 연구서나 논문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에 비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분들을 연락해도 이제는 별로 관심이 없단다. 개인적으로 연구 영역이 바뀐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차지하는 현재의 위치를 직시하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사상사의 연구자 숫자가 극히 한정되어있는 현실에서 어느 한 인물이나 주제에 대해 누군가가 연구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맡기고 다른 인물이나 주제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대사상가가 아닌 인물들에 대한 학문적인 토론은 내용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청탁을 받은 ‘비코 연구의 역사와 현황’이 아니라 ‘한국에서 비코의 사상을 어떻게 전유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미래지향적인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1990년 이후 비코에 대한 글을 쓰셨거나 읽으신 적이 있다면 제게 알려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조한욱 / 한국교원대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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