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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없는 시대, ‘학문종말론’에 대한 불안
발견 없는 시대, ‘학문종말론’에 대한 불안
  • 박강수
  • 승인 2021.08.23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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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 연구주제 찾기가 어려워진다, 학문의 진보는 끝에 다다른 걸까?

경제학자이자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인 노아 스미스는 지난 3일 미국의 고등교육전문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이하 ‘크로니클’)에 ‘학문이 끝에 다다랐을 때’라는 글을 실었다. 점점 더 새로운 발견이나 연구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불안, 이른바 ‘학문종말론’에 대한 논평이다. 그는 “아무 학문 분야나 골라 ‘XX의 종말(The end of X)’이라고 구글링하면 관련된 우려나 절망을 담은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썼다. 스미스는 현재의 술렁임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부상하기 직전인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의 야단법석처럼 공연한 걱정일수도, 실제로 구조적 한계점에 다다른 징후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학문의 진보는 종착역에 닿은 것일까.

 

영화 '투모로우'(2004)의 한 장면. 얼어붙은 도서관. 사진=IMDB
영화 '투모로우'(2004)의 한 장면. 얼어붙은 도서관. 사진=IMDB

 

과학의 종말에서 학문의 종말로

 

이 비관론의 뿌리는 1996년 출간된 『과학의 종말(The End of Science)』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의 대중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과학 기자 존 호건의 책이다. 그는 당대 과학계의 슈퍼스타들을 인터뷰하고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의 발전은 끝났다”는 결론을 냈다. “우주와 생명의 굵직한 비밀은 대부분 밝혀졌다. 진화론이나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급의 혁명적인 발견은 더 이상 없을 것이고, 앞으로 과학은 점진적인 확장과 교정에 그칠 것이다.” 호건의 예단이다. 과학의 진보는 무한한 프로젝트가 아니고, 위대한 발견과 혁신적인 발명의 쳇바퀴는 영원히 순환할 수 없다는 대답이다.

호건의 ‘과학종말론’은 격론을 불렀다. ‘자기 만족을 위한 비판주의자’라는 비판이 있었는가 하면, 그가 책에서 인터뷰한 에드워드 위튼,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거장들이 호건의 면전에서 “웃기는 이야기”라며 타박하기도 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인간 게놈지도가 완성되거나 힉스 입자가 발견되는 등 위대한 성취도 이어졌다. 호건의 입장은 수그러졌을까. 답은 여전히 ‘아니오’다. 그는 2015년 『과학의 종말』 재출간 기념 서문에 “그 때나 지금이나 내 믿음은 변함없다”고 썼다.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지식체계의 수정을 요구하는 발견은 없을 것이고,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뿌리 같은 본질적인 테마들은 영구미제로 남겨질 것이다. 과학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과학 저널리스트 존 호건과 그의 대표작 '과학의 종말'
과학 저널리스트 존 호건과 그의 대표작 '과학의 종말'

 

심지어 호건은 이렇게 덧붙였다. “30년 이상 과학을 지켜봤지만 과학적 이상과 현실 사이 괴리가 오늘날만큼 컸던 적은 없다.” 자신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현대의 과학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에 부합하듯, 가시거리에 들어온 학문의 종착역에 대한 불안감은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감지된다. 영국 런던정경대의 철학자 리암 코피 브라이트는 지난 3월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분석철학은 퇴보하는 프로그램이다. 학자들은 (분석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더 낫게 개량된 접근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애초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 확신을 잃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분석철학 체계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이미 실패한 것 같다.”

미국 조지메이슨대학의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타일러 코웬 역시 지난 5월 ‘경제학이 우리를 망치는 이유’라는 제목의 블룸버그 기고문을 통해 “오늘날 경제학계의 가장 큰 문제는 지적 다양성이 줄어들고, 급진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스탠포드대학의 수학자 키스 데블린은 2013년 “한 세대 안에 우리가 알고 있던 수학은 끝을 맞을지도 모른다”라고 비관했고, 2014년에는 신경생리학자 스티븐 로즈가 “신경과학이 발전하면서 심리학은 점점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힉스 입자를 발견한 대형입자가속기(LHC)가 많은 물리학자들의 기대와 달리 입자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 바 있다.

 

채용과 실적, 지원금에 장악된 연구자들

 

‘인류의 지적인 혁신은 끝났다’는 주장에 대해 당장 진위를 판별할 방법은 없다. 다만 스미스가 강조하는 것은 실제 학문의 운명과 무관하게 우리의 대학연구 시스템이 새로운 발견이나 혁명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교육과 연구의 부조화다. 대학은 입학하는 학생의 교육 수요에 맞춰 가르칠 사람으로서 교수를 채용하지만, 채용된 교수들은 논문 생산력과 연구실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이중고에 놓여 있다. 그 결과 더 중요한 연구 분야가 아닌 더 많은 학생이 몰린 학과를 중심으로 연구자가 충원된다. 연구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첫 구조적 요인이다.

이어서 스미스는 학문의 보상 체계를 지목한다. 그는 채용에서 논문발행, 연구비 지원까지, 시스템 전체가 익숙한 주제에 안정적인 방법론을 활용한 기성의 연구 트렌드를 쫓는 이들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돼 있다고 말한다. 학계는 구조적으로 혁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가 예시로 드는 MIT슬론 경영대학원 피에르 아줄라이 교수 연구팀의 2019년 논문 「과학은 장례식 한 번에 한 걸음씩 진보하는가」의 내용이 흥미롭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를 대표하는 거물급 생명 과학자가 죽고 나면, 그의 존재감에 짓눌려 있던 다른 주제, 새로운 영역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유입되는 글의 주제 자체가 극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실제로 학문의 종말이 가까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종말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학자들이 소모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기성 연구자가 신입 연구자를 심사해 채용하는 시스템 속에서 선배의 전공이나 연구 철학에 부합하는 신입들이 선호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연구 결과가 뒷받침해 준다고 스미스는 설명한다. 존경 받던 시니어 연구자의 퇴장은 그 자체로 해당 분야의 학술적 활력으로 되돌아온다. 출판도 마찬가지다. 독립연구자 호세 루이스 리콘이 과학 분야에서 ‘피어리뷰’로 논문 게재가 거절된 사례 수십 건을 추적한 결과, 일부 기성 연구자들이 분명하게 새로운 연구 시도를 제어하는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일련의 편향은 실적이 검증된 익숙한 연구 분야로 지원금도 몰리는 현상과도 궤를 같이 한다.

스미스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오래되고 소진된 분야에서 최후의 부스러기를 긁어 모으는 데 열중하고 있다. 조금 더 나은 동태확률일반균형(DSGE) 모델을 만들고, 조금 더 정확하게 힉스 보손의 질량을 알아내는 그런 일들을. 이것은 우주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을 꿈꿨던 연구자들에게 막대한 환멸을 불러 일으킨다”고 썼다. 그 역시 해결책은 모르겠다고 말한다. 다만 학계의 뒤틀린 보상체계가 연구자들의 의지를 장악하고 있다면, 학문의 시스템이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만큼은 사실 아니겠냐는 것이 그의 잠정적 결론이다. 실제로 학문의 종말이 가까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종말을 앞당기는 방식으로 학자들이 소모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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