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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와 나눈 ‘역사란 무엇인가’
MZ세대와 나눈 ‘역사란 무엇인가’
  • 박원용
  • 승인 2021.08.24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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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_박원용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양사의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학생들과 교감하며 지낸 시간이 벌써 이십여 년이 지났다. 다양한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인물들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시했지만 내가 특히 열의를 가지고 임했던 강좌는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사학과에 진학한 학생들이 이러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생각의 정리 없이 전공 수업을 적극적으로 꾸려나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추상적 개념으로 가득한 강좌의 내용을 수강생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것인가가 첫 번째 해결과제였다. 일방적인 강의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은 몇 해의 시행착오로 분명해 보였다. 시각 매체에 익숙해져 있는 세대에게 눈에 보이지 않은 ‘역사의 인과관계’, ‘제한적 객관성’ 등의 개념이 일방적인 강의를 통해 전달될 수 없었다. 매 시간 중심 개념을 선정하고 이것과 관련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생각을 교수와 학생 양측 모두의 참여 아래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 강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겨졌다.

질문을 제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재 선택이 그 다음 문제였다. 강좌 제목과 동일한 E. H. 카의 책을 학생들에게 몇 해 읽혀 보았지만 그들의 감각에 부합하기에는 시대적으로 너무 뒤쳐져 있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까지 역사 인식의 측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포스트모더니즘, 신문화사의 연구방법론 등을 카의 책을 통해서는 전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21세기의 현대적 감각과 부합할 수 있는 책을 쓰기에는 능력과 시간 모두가 미치지 못했다. 차선책으로 최근까지 역사연구의 경향을 포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MZ세대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는 책을 번역하여 학생들과 상호소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수단과 방법적인 측면에서 강좌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았지만 수강생들의 불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장문의 문장을 수업에 들어오기 전까지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단문의 의사소통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매 시간마다 많은 수의 수강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학생들을 지명한 다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 이르게 되면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같이 협소한 차원에서부터 ‘역사는 진보해 왔는가’와 같이 포괄적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그런 질문에 당황해하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는 비정상적 교수가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있었다.

그런 의혹을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학기 말까지 가져가지 않았던 것은 서로가 나누었던 다양한 주제 모두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수강생들이 확실히 납득했기 때문이었다. 즉 한 학기 동안의 소통의 과정을 통해 역사가 닫혀 있는 학문이 아니며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학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역사인식은 화석화되어 있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변화할 수 있다는 인식을 어렴풋하게나마 갖게 되면서 남아있는 사학과 학생으로서의 시간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위로를 얻게 되었다는 작별의 말을 그들은 전해 주었다.

유럽 현대사, 특히 러시아 현대사 전공자로서 전공분야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당연히 소홀히 할 수 없지만 학생들과의 소통의 경험에서 쌓이게 된 이러한 기쁨 때문에 역사연구와 관련된 근본 질문을 학생들과 어떻게 하면 잘 나눌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전공분야의 연구가 학생들의 강의에 그대로 활용될 수 있는 여건이 연구자에게는 최선의 환경이겠지만 지역 국립대학의 특성은 그러한 연결을 어렵게 한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에게 전공자들 사이에서 얘기되는 저 먼 나라의 얘기를 강조할 수만은 없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와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사학과의 학생들에게 역사적 사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이고 화석화되지 않은 역사상은 무엇인지를 놓고 소통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적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전공영역과 관련된 책을 읽다 말고 다양한 역사현상을 참신한 시각으로 풀어낸 책을 또 다시 집어 드는 이유이다.

 

 

박원용 부경대 사학과 교수
서울대 졸업 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 혁명 이후 고등교육 체제 개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해양공간과 연관시켜 러시아 극동지역을 연구하고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신체문화와 스포츠』, 『스포츠가 역사를 말하다』(공저)를 쓰고 『E. H. 카 평전』(역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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