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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가득한 ‘소외’ 품는 종교, 가장 낮은 생태계에 귀 기울이다
고통 가득한 ‘소외’ 품는 종교, 가장 낮은 생태계에 귀 기울이다
  • 유무수
  • 승인 2021.08.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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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낮은 곳에서 열리는 삶: 종교』 신익상 지음 | 이다북스 | 232쪽

선한 사마리아인과 보현보살은 소외의 영역에
쉼과 힘을 공급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지난 7월 한 대형사찰의 승려들이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의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어겼다가 과태료 10만 원씩을 물게 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들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요즘 기독교는 시중에서 ‘X독교’라고 불리는 지경에 처했다. 성직자들이 이기적인 야심과 쾌락에 빠져든 모습은 종교 자체를 회의하게 한다. 가짜 종교인을 판단과 선택의 기준으로 설정한다면 무종교가 답이다.

물리학과 종교철학을 공부한 저자는 기존 종교에 비판적이지만 천 년, 이 천 년의 생명력을 유지해온 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 종교가 탄생한 정신, ‘참된 종교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지혜를 모색한다. 저자에 의하면, 부와 권력이 얽힌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제도화된 종교, 획일적인 진리 주장이나 제도 또는 교리로 삶을 옭아매는 종교, 세상의 이치를 이용해 자기 자리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종교는 진짜 종교일 수 없다. 예수는 유대교가 결정하여 주입하고 강요하는 교리와 규정을 재해석하거나 반대했다. 종교의 정신은 “결정된 진리에 반성의 칼날을 들이대는 예리함”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정된 진리는 구별하고 판단하며 심판하는 도구가 되며, 싸움을 일으키고 소외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붓다의 고향 인도는 카스트 체계 속에서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계급만이 신과 하나 될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상위 계층은 나머지 하위 계층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붓다의 깨달음은 브라만도 자아도 허깨비이며, 따라서 카스트의 질서도 허깨비임을 조명했다. 이는 잘못된 제도에 억압되고 소외당하는 이들에게 해방과 행복을 선언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깨달음이기도 했다. 예수가 살던 시절 유대인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로마제국은 조공을 받아 풍요를 누렸으나, 유대 백성들은 노예의 삶으로 소외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가 등장했다. 그는 기쁜 소식을 외쳤다. “마음을 고쳐먹어라, 천국이 들이닥치고 있다.” 그는 소외당하는 사람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사람이 되는 꿈을 꾸게 했고, 소외의 주체가 구원의 주체가 되게 했다. 붓다와 예수는 낮은 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에게 삶을 열어갈 수 있는 희망과 개념을 공급했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공감과 자비가 참된 종교의 모습이다. 

기술과학의 발달과 함께 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받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 인간의 노동이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되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사회적 구조와 위계의 그물망 속에서 청년세대는 희망보다 절망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에 빠져들고 있다.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소외의 영역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교수신문>과 서면 인터뷰에서 저자 신익상은 자연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종교를 강조했다. “참된 종교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지구 위의 모든 존재들, 즉 이 세계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서 고통을 겪는 생태계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저자에 의하면 소외의 영역이 있는 한 종교의 역할이 더욱 요청된다. 소외의 영역에는 고통이 있고 참된 종교인은 고통에 감수성이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나 보현보살은 소외의 영역에 공감과 자비를 표현했다. 소외의 영역에서 고단한 이들에게 쉼이 있게 하고 희망과 생명의 풍성함을 향한 힘이 회복되게 한다면 아름다울 것이다. 참된 종교는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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