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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800만 신들의 대화합을 기원하는 이유
일본인이 800만 신들의 대화합을 기원하는 이유
  • 유무수
  • 승인 2021.08.20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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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소확행하는 고양이』 정순분 지음 | 소명출판 | 345쪽

자연재해를 자주 겪어온 일본인들
가능한 많은 신들 믿으며 재앙 피해

2011년 3월 11일 쓰나미가 동일본을 강타했다. 미야기현 나토리시에 거주했던 대학생 이시카와 나오키는 <NHK> 스페셜 방송에 출연하여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쓰나미에 휩쓸렸던 이시카와는 떠밀려온 이웃의 지붕을 잡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주택들이 모두 쓸려 가버린 동네는 허허벌판이 되었다. 기초만 남은 집의 바닥을 어루만지는 그의 표정은 망연자실했다. 2층으로 대피했던 부모와 여동생은 모두 사망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울먹임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성통곡을 하지도 흐느끼지도 않았다. 우리 한국문화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인 정순분 저자에 의하면 일본인은 인간관계에서 남에게 과도하게 부담을 주거나 민폐가 되지 않으려고 유념한다. 사면이 바다이고 천재지변이 잦은 나라이기에 옛날부터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미약하다고 생각했으며 자연스럽게 희로애락의 기본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절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2004년 일본인 고다 쇼세이 씨가 이라크 무장조직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 유족은 언론에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이 책의 제목 ‘소확행하는 고양이’는 일본의 현 상황을 상징한다. 소확행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수필집에서 처음 사용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거품경제의 부작용으로 일본의 젊은 세대는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소확행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의미 있는 삶과 정신적 행복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대부터 일본은 작은 집에 만족하고 소박한 음식에 감사하며 사는 데 익숙했다. 불교의 젠(禪) 사상은 극한의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무사정신과도 잘 맞았다. 이는 단순함과 순수미와 절제미, 안정감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과 연결되기도 한다. 저자의 해석에 의하면 독립적이지만 인간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고양이의 특성은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일본인의 독립정신을 닮았다. 

자연재해를 자주 겪어온 일본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신을 숭배하여 재앙을 피하고자 했다. 4세기 초에 야마토 지역을 다스리던 씨족 집단이 최초의 통일국가를 수립했을 때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각 씨족 집단의 신들을 배치했다. 국가 이름인 야마토의 한자를 ‘대화(大和)’로 한 것도 대화합의 취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화(和)’는 일본의 정신을 나타내는 글자로 이념화되었다. 중심이 되는 신과 다양한 신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신화를 만든 것이 일본에 800만 신이 존재하게 된 배경이다. 일본의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여러 신들이 힘을 합쳐서 자연계와 인간을 지키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 책은 천황과 귀족(무사, 총리)의 이원적 지배구조, 신도(神道), 정치·경제·학문·예술 등 사회 전반에서 가업의 세습, 장인정신, 자연을 축소시킨 정원, 저출산·고령화와 빈집의 문제, 돈가스의 탄생, 우동과 소바, 내부가 오밀조밀한 단독주택, 출판대국을 뒷받침하는 만화, 한 분야에 심취하는 오타쿠 문화, 지역축제, 열차, 온천 등 30개의 항목을 통해서 일본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슬픔의 공개적인 표현을 그토록 억제하는 일본인들이 면 요리를 먹을 때는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일컬어지는 일본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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