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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 특집: 성과와 한계-역사학,인류학
구술사 특집: 성과와 한계-역사학,인류학
  • 윤택림 한중연
  • 승인 2005.03.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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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사 아카이브 구축 시급

▲윤택림 교수 ©
한국 역사학과 인류학에서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80년대 초 ‘뿌리깊은 나무’ 종래의 역사학에서 배제됐던 민중들의 구술생애사를 처음으로 출간했으나, 이것은 저널리스트들이 역사학 밖에서 구술채록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 민중자서전은 다양한 민중들의 삶을 채록했는데, 구술의 텍스트화에서 구술(방언)의 재현에 특별히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구술에 대한 관심이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까지 출간된 ‘역사비평’ ‘현대사증언’ 시리즈다. 이것은 당시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일제시기 및 해방 이후 좌익활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분야는 반공이데올로기 하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기 힘든 금기의 영역인지라 사료발굴이 어려웠기 때문에, 구술 증언들을 통해 현대사의 이면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증언들은 사건 중심적인 서술이 될 수밖에 없었고, 구술은 여전히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취할 수밖에 없는 보조적인 자료였다.

비슷한 시기에 최초의 구술증언자료집인 제주 4.3연구소의 ‘이제사 말햄수다 1,2’(한울 刊, 1989)가 출간됐다. 이것은 현대사증언 시리즈와 비슷한 맥락에서 친미정권과 반공이데올로기 하에서 발성될 수 없었던 제주도민들의 4.3의 경험을 구술로서 드러내어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였다. 이 증언집엔 민중자서전과 비슷하게 특정 주제의 제목을 가진 이야기들이 실려있는데, 증언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인명색인으로 대체했다. 제주도 방언은 거의 표준말로 고쳤으며 제주말 용례보기를 첨부했다. 1994년 제주일보 4.3취재반이 취재기사로 냈던 글들을 모아서 출간한 것이 ‘4.3은 말한다’(전예원 刊)이다. 이 책은 구술증언집이 아니라 기록과 구술증언을 포함한 자료들을 가지고 기자들이 4.3에 대한 새로운 역사쓰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구술증언은 기록이 없는 경우에 사건 전개의 필요에 따라서 인용됐으며, 구술의 재현, 즉 제주도 방언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렇게 기존의 역사에 기록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사실들을 드러내고 재구성하기 위해서 도입된 구술증언은 1993년 다른 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펴낸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한울 刊)이다. 이 증언집은 2001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서 일제 식민지배를 규탄하기 위해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군위안부들의 경험을 드러내기 위해서 출간됐다. 즉 구술증언은 일제 식민지배가 조선 여성의 몸과 성을 착취한 역사적 증거로서 사용된 것이다. 이 증언집은 여러 해를 거치면서 구술사에 대한 이론적 방법론적 관심을 증대시켰고, 특히 4집은 구술증언의 텍스트화와 구술의 재현에 큰 발전을 보였다.

이같은 작업들은 사실상 문서연구 중심인 역사학계 밖에서 저널리스트, 현대사연구자, 여성학자들이 운동선 상에서 새로운 역사쓰기를 위해 구술증언을 발굴해낸 것이었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 서구의 구술사 이론들이 소개되면서 인류학계에서 구술채록보다는 현지조사에 기초한 구술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돼왔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인류학연구회에 속해 있는데, 구술사 사례 연구뿐만 아니라 구술사와 생애사에 대한 이론적 방법론적 논의를 정리하여 발표해왔다. 나와 함한희는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현지조사를 동반한 구술사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전쟁경험과 농지개혁에 대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유철인과 김성례는 여성구술생애사에 대한 이론 및 방법론적 논의와 제주4.3과 여성들의 경험에 대한 사례연구들을 발표했다. 윤형숙과 박정석은 전라도 특정지역에서의 한국전쟁경험에 대한 연구들을 발표했다. 이렇게 활발한 인류학자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단행본으로 출간된 구술사 연구는 본인의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역비 刊, 2003)와 역사인류학연구회가 충남 서산에서 현지조사와 구술사 인터뷰를 통해서 재구성한 지방사인 ‘인류학과 지방의 역사’(아카넷 刊, 2004) 정도다.

 
역사인류학에서 구술사는 구술자를 역사의 주체로 보고 구술자의 시각으로부터 사회와 구조, 역사를 이해하려는 ‘밑으로부터의 역사’의 일환이며, 기존 역사에 대한 대안적인 역사쓰기다. 따라서 역사인류학자들은 구술자료가 주는 역사적 사건의 사실성 보다는 개인들의 주관적 경험과 해석, 그리고 개인들을 둘러싼 문화적 생활세계와 세계관에 더 관심이 있다. 또한 구술자료의 구술성에 주목하고, 그 연행적 성격과 재현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역사인류학자들의 구술사 연구는 지방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관심은 주로 지방에서의 역사적 경험과 그에 대한 해석들인데, 이것은 지방민을 역사의 주체로 보고 그들의 관점에서 주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반공이데올로기나 미국과의 외교적 관계 때문에 현대사 연구에서 가려졌던 지방사 연구들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에서 한 한국전쟁경험에 대한 구술채록 및 연구와 전남대 5.18연구소의 구술채록 및 연구다.

또한 역사인류학자들의 구술사 연구에서 구술자들은 단지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증인의 범위를 넘어서서 생활문화사나 일상생활사에 대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표적인 연구가 민중생활사연구다. 민중생활사연구는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소외계층의 일생생활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데, 이 때 구술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인류학자들의 구술사 연구는 또한 여성연구에도 많은 자극을 주었다. 여성학은 기존의 양적연구중심의 사회과학 이론과 방법론을 비판하고, 질적연구방법을 받아들였다. 여성학자들은 질적연구방법 중에서 구술생애사 연구방법을 선호하게 됐는데, 그것은 구술생애사가 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게끔 도와주기 때문이다. 여성학계에서는 군위안부의 구술증언 채록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다양한 한국여성들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구술생애사 채록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인류학자들의 구술사 연구 성과들은 역사학계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서, 1990년대 말부터 역사학계에서도 현대사 연구에 구술증언을 포함하게 됐다. 1999년부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가 출간한 증언집들은 해방, 건국, 분단, 한국전쟁, 박정희정부 등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한 인물들의 구술생애사를 채록한 것이다. 이 증언집들은 정치사건사 중심의 서술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구술의 텍스트화를 보다 세심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 구술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구술증언 채록에 한정되어 있고, 본격적인 구술사 연구는 미비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지속적으로 현대사 구술 채록을 지원하고 있고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기존 역사학계는 아직도 적극적으로 구술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현재 기록에서 소외된 20세기 삶의 경험에 대한 구술 채록이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구술 자료 수집과 채록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채록중심의 구술사 연구는 한계가 있고, 구술사 연구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구술사를 대안적 역사쓰기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구술사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은 구술자료로서가 아니라 기록이 배제시킨 개인들과 집단들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구술사 전문연구인력의 배출과 구술아카이브의 구축이다. 한국 구술사연구의 양적인 발전은 이제 학제간 구술사 전문연구소와 전문연구인력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 와 있다.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구술사 프로젝트들이 수집하는 자료들을 체계화하기 위해 하루 빨리 구술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윤택림 / 한국학중앙연구원·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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