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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2004| 480쪽
서평:『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정용화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2004| 480쪽
  • 김석근 연세대
  • 승인 2005.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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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실종된 계몽주의...세계화에 대한 고민 안겨줘

이미 알려진 비밀에 속하지만, ‘Civilization’과 ‘文明’이라는 개념은 도저한 정치성과 더불어 역사성을 갖는다. 자신과 타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전제하고 있으며, 나아가 양자 사이의 ‘권력’ 관계와 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문명화’는 엄숙한 ‘사명’인 것처럼 꾸며지고, 그 연장선 위에서 지배와 침략행위를 정당화, 합리화하는 교묘한 기제로 쓰이게 된다. 

흥미로운 물음 하나는, 거의 비슷한 논리와 인식체계가 서로 부딪히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어느 한 쪽이 문명의 ‘표준’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것은 ‘힘’에 의해 결정된다. 논리가 힘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힘이 논리를 뒷받침해주게 된다는 것. 유길준이 살았던 시대, 19세기말이 그러했다. 이른바 ‘문명 충돌’ 내지 ‘세계관 충돌’의 시대였으니까.

마침내 동아시아 세계의 ‘문명’의 축은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현실에서 그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다 바뀔 수는 없었다. 특히 국제정치 영역에서 종래의 사대질서와 새로이 등장한 만국공법 질서라는 ‘이중적인 국제질서’가 그같은 상황을 상징해주고 있다. 유례없는 격변기를 살았던 지식인들의 사유 역시 문명개화, 동도서기, 위정척사파 등으로 다양하게 나뉘었다.

그 같은 스팩트럼 속에서 유길준이 공굴렸던 정치적 사유는, 동의나 공감 여부에 관계없이, 단연 두드러진다. ‘시세와 처지’를 중시했던 그가 자신의 시대를 읽었던 시선은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그것이었다. 대표작 ‘서유견문’, 특히 개화의 주인, 손님, 노예, 그리고 개화의 죄인, 원수, 병신을 말하고 있는 ‘개화의 등급’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근대적 국제질서로의 이행과 자주 독립, 행위자로서의 근대 국민국가 형성, 그리고 국민과 개인이라는 근대적 인간형의 창출에 이르기까지, 유길준이 가졌던 다양한 문제의식과 복합적인 고뇌를 충실하게 그리고 가능한 생생하게 그려내 보여주려고 한다. 그같은 시도는 거의 성공에 이르고 있는 듯하다.

저자에 의햐면, 유길준의 지적 실험은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조선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전통과 근대를 복합적으로 활용해 더 나은 보편 문명을 창출하고자 했다고 자리매김한다. 그러면서 당시 문명에 충실한 나머지 자칫 잘못해-윤치호의 사례가 말해주듯이- 예기치 않게 빠져 들 수 있는 ‘문명개화론의 덫’이 있다는 점도 일러주고 있다. 이른바 ‘주변부 지식인’들이 빠지기 쉬운 ‘허위의식’을 경계해마지 않는다.

그 같은 논지와 해석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읽어가는 동안 평자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다음의 두가지 사항을 덧붙여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논의가 좀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자 동시에 일종의 토론거리라 해도 좋겠다. 

첫째, 서구에서 내세웠던 '문명'과 ‘보편성’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문제. 문명이라는 보편적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비서구지역 개별국가의 ‘독립’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찌(福澤諭吉)는 ‘文明論之槪略’(1875)의 결론 10장에서 (일국의 독립이 아니라) ‘自國의 독립’을 논하고 있다. 그는 (문명이 아니라) 자국의 독립이 ‘목적’이며, 문명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허나 유길준을 비롯한 개화사상가들에게 그 같은 개별국가의 ‘독립’에 대한 철저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좀 약하지 않았던가. 교육과 지식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정치’ 영역을 소외 내지 실종시켜버렸던 것은 아닐런지.      

둘째, 유길준의 ‘행실의 개화’는 유난히 시선을 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하는 다른 영역의 개화와는 달리, 행실은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는 행실의 개화, 구체적으로 유교적인 도덕과 윤리에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더러 오해를 낳고 해석이 갈리는 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당시 국제질서에 대한 리얼한 현실 인식과 양립할 수 있는가. 있다면 또 어떻게? 그것은 어쩌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자기정체성 문제일 수도 있겠고, 문명의 현실태로 다가오는 서구적인 문명이 지닌 함정을 간파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간다면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인 문명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이같은 상념에 빠져 있던 평자에게, 저자는 유길준의 지적 실험과 그 교훈을 21세기의 오늘날에 걸맞게 새롭게 읽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21세기 한국형 세계화’를 구상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 複話術이라 해도 좋겠다. 그 순간, ‘개화’는 ‘세계화’로 치환되어 읽히기 시작했다. 그렇다, 혹시 나는 세계화(개화)의 죄인, 병신, 원수는 아닌지…. 그리고 유길준이 그랬던 만큼 나는 지금 이 시대를 깊이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김석근 / 연세대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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