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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 ‘한국현대무용 뮤지엄’ 을 비판한다
무용비평: ‘한국현대무용 뮤지엄’ 을 비판한다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5.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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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선정 완벽한 졸속...동종교배의 실상 드러내

한국 현대무용 반세기를 회고하는 자리가 ‘한국현대무용 뮤지엄’이란 타이틀로 지난 3월 2일에서 9일까지 열렸다. 해방이후부터 시작된 현대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보고자 45편의 대표작들이 릴레이로 공연됐는데, 무용계와 문화예술계 전문가 1백명의 추천을 받은 작품들이다. 심포지엄과 전시회도 함께 열렸는데, 그러나 무용계 사상 가장 큰 기획인 이번 행사가 과연 현대무용의 역사를 제대로 짚었는가를 반성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재연된 작품들은 어떤 점에서 역사적으로 기억될만한 것인가, 제대로 준비되었는가도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편집자주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장면에 태어난 아기는 돼지꼬리를 달고 있다. 작가 마르케스는 이 아기를 빗대어 “백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다”라고 마콘도 마을의 운명을 적고 있다. 끊임없는 동종교배가 낳은 비극이 어디 한 종족의 역사뿐이겠는가.

‘한국현대무용뮤지엄’(이하 ‘뮤지엄’)은 ‘뮤지엄(museum)’이란 묘한 꼬리를 달면서 ‘향후 1백여년을 전망하는 축제로서 약 반세기간의 한국현대무용의 역사적 발자취를 회고하고 미래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고 풀이했다. 지난 2월 28일부터 3월9일까지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에서 진행된 이 기획행사는 무려 45편의 현대무용을 무대에 올리면서 통시적인 현대무용의 역사를 정리하겠다는 야심을 선언했다. 동시에 단순한 과거의 회고 취미가 아니라 현재 답보상태로 진단되는 현대무용의 한계를 돌파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까지 했다. 한국현대무용을 사랑하는 이들의 관심을 모은 이 행사가 그러한 의의와 목적을 충분히 성취했는지는 깊은 의문이다. 우선 근대 이후 이 땅에서 춤예술이란 자의식을 지닌 채, 의식적으로 활동해온 현대무용의 역사가 얼마만큼이라도 반영됐는지부터가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뮤지엄’처럼 거창한 레테르를 붙이기에는 이번 행사의 작품 선정이 완벽한 졸속이다. 한국현대무용의 기점이 된다는 1930년대 최승희의 춤에서 현재의 춤에 이르는 반세기를 모두 담아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의상 10년 단위로 조정되는 예술사의 기준을 따라 각 연대별로 대표작들을 엄선해 역사적 흐름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 서구의 충격을 받아 자내적으로 현대무용을 소화하는 그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어떻게 한국현대무용의 반세기를 운운할 수 있을까. 이 공연을 통해 한국현대무용을 성급히 일반화하면, 194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공동화 현상을 겪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육완순의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1973년)와 최청자의 ‘불림소리’(1989년)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1990년대에서 2000년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올해초 공연된 작품들도 무려 9개 작품에 이른다. 지난 3개월 동안 이미 무대에 오른 신작을 서둘러 작품 목록에 끼워넣은 행태는 이유도 영문도 알 수 없는 사무적인 재공연이란 결과뿐이다. 역사적 천박성을 과시하며 한국현대무용의 과거와 미래를 운운하는 것은 이미 이 행사가 크게 금이 갔다는 반증이다.

역사적 시야는 잠시 미뤄두자. 2000년대 초연된 작품들 각각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연 이것이 한국현대무용의 동시대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특정한 소재에 단순집착하는 민망한 공연이나 낡아빠진 퍼포먼스의 나열, 스테레오타입화된 춤의 끈덕진 반복 등등 현재 한국현대무용이 극복해야 할 과제를 기술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이 많았다. 역설적으로 그런 면에서 ‘뮤지엄’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나아가 김성한의 ‘Story about Enemy’가 보여주는 남성파시즘에 가까운 무차별적 폭력의 무감동한 세계는 지나치게 몰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이다. 김영진의 ‘Exchange’는 무용수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의존하나 그것이 가져야 할 의미화작용을 완벽하게 등지고 있다. 이처럼 단순히 객관세계를 조형적으로 짜맞추며 無를 지향하는 그런 메마른 무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마사 그레이엄의 어두운 유령이다. 국내 현대무용의 초기에 그레이엄이 득세했고, 현재도 일각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다.

1940년대 이후 미국 현대무용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그의 춤철학과 테크닉은 국내에도 많은 공적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를 사사한 육완순이 한국현대무용의 선지자로 등장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현재는 지나치게 교조화된 그레이엄 테크닉과 부질없는 내면놀이에 집착하면서 수렁에 빠져든 듯한 인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사 자신은 동양의 춤에서 긴장과 이완의 호흡, 내면을 발견했다고 술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뮤지엄’은 미국식으로 소화된 마사의 춤을 지나치게 도구적으로 소화하고 반복하는 공연들로 차고넘친다. 이것이 앞서 말한 동종교배의 실상이다.

춤은 ‘모래의 책’이다. 쓰고난 후, 계속 새로 써가야 하는 책이다. 멈추는 그 순간 머무르게 되고, 머무르면 춤의 입장에서 우리 몸의 죽음이다. 1973년 초연된 육완순의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는 아무리 봐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동명 뮤지컬과 친척 관계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작품의 번안이며 한때 ‘수입대체 문화상품’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이미 그 뮤지컬이 들어온 이 시점에도 여전히 ‘고전’의 지위를 누리며 머무르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결국 ‘뮤지엄’의 가장 큰 문제는 그레이엄에 사로잡힌 영혼들의 안주도 한몫하고 있으며, 거꾸로 말해서 ‘수퍼스타 예수그리스도’를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승의 은혜를 갚는 길은 스승을 뛰어넘는 것인데, 지나치게 사승 관계가 돈독한 것도 발목을 잡는 일이다.

▲안애순무용단 '원' ©

이쯤 되면, 레밍턴의 집단자살에 비견할 만큼 맹목적인 그림이 연상될 테지만, 모든 동어반복 속에서도 돌연변이를 통해 새로운 진화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안애순의 ‘On Time’이나 남정호의 ‘꿈꿀 권리’가 가진 유희의 여백이나 조성희의 ‘입춘대길/위기의 여자’가 풍겨내는 독특한 연극성, 이경은의 ‘Off Destiny’가 품은 몸性의 자각도 미래가 보인다. 특히 장은정의 ‘Red’는 돼지꼬리를 잘라낸 낯선 보석같은 작품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날을 보여주는 음악의 선곡도 탁월하지만 그 음악과 빛이 만들어낸 독특한 시공간에서 체화된 춤의 새로운 해석이 살떨리게 한다. 우리 자신으로 돌아온 몸 주관이 주체적으로 등장해 마사 그레이엄의 끈적끈적한 그림자를 극복한 것이 더욱 놀랍다. 그가 있어서 이번 ‘뮤지엄’ 행사를 전체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새로운 ‘뮤지엄’에는 좀더 많은 신진대사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역사의 깊이를 더해야 할 것이다.

김남수 /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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