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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56: 역사도 인생도 다 내 속에 있다
내가 본 함석헌 56: 역사도 인생도 다 내 속에 있다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3.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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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과정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과정이고 또 흘러 돌아가는 과정이다. 로고스는 만물의 근원이요 또 만물의 귀착점이다. 그는 창조자요 또 통합자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의미는 ‘사랑’에 있다. 만물을 낳은 것은 이 아가페이다. 그러나 지음을 받는 만물이 세상에 있는 한 그는 어두움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땅에 있으면서도 땅에서 떠나려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개의 영이 가슴에 들어 있어 사우는 것은 괴테만이 아니요, 만물이다. 실로 만물은 그 신체의 구조에 있어서까지 이를 표시하는 듯하다. 뿌리는 향지성이 있어도 싹에는 향일성이 있고 하등동물에서 고등한 것에 갈수록 지면에서 해방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벌레는 배로 다니고 獸類는 네 발로 서고 인간에 이르러 두 다리로 선다. 인체의 구조는 물리학적으로 하면 확실히 안정치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부자연한 자세를 취하면서까지 무거운 두부를 위에 두고 두 다리로 서는 것은 그의 존재의 의미를 상징하기 위함인 듯하다. 그의 눈을 보라. 영원히 상공을 바라보게 위치하지 않았나…. 진화란 다른 것이 아니요, 땅위에 난 생명이 땅에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진화를 생물학자와 같이 다만 연속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물론 광물은 식물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식물은 동물에서 하고 동물은 인간에서 그 의미를 다하는 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일직선은 아니다. 광물에는 광물의 의무와 가치가 있고 식물에는 식물의 독특한 것이 있고 동물에는 동물의 특유한 것이 있다. 각 종류는 합하여는 전체를 위한 준비적인 존재면서도 또 자신으로는 성(性)을 가지는 자다. 진화론은 種은 종에서 나온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양자의 사이에는 합할 수 없는 斷隙이 있다. 신종은 다만 변형한 것이 아니요 새로 창조된 것이다. 구종을 아무리 변형시켜도 어떤 새 것을 가하지 않고는 신종이 안된다. 이는 최근의 突變化說이 뒷받침하는 바다. 마치 화가가 화폭에 一筆一筆을 가해감과 같다. 일필일필을 가해서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니요 그림이 먼저 있어서 일필일필을 규정하는 것이며 前一劃이 後一劃을 낳는 것이 아니요 일필일획에는 그때마다 새 창조가 加入되는 것이다. 신종은 변화만이 아니요 창조다. 그러므로 물적 현상으로 하면 만물은 진화된 것이요 그 근본의미로 하면 각각 특수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와 만물의 진화에는 처음부터 나중까지 아가페로써 일하는 하나님의 창조의지가 움직이고 있다.>(전집 9: 76~78)

위의 글은 1964년 정식으로 출판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까닭에 이 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원판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 글로서 실질적으로는 1940년대에 쓰여진 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금에 쓰여진 글이 아니고 지금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는 옛날에 서술된 글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최근에 서거한 굴드(Steven J. Gould)를 연상케 하는 오늘의 진화론에 대한 논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신선함을 던지는 글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12일(2005)에 있었던 ‘함석헌 선생 탄신 104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김상봉박사의 ‘함석헌의 ‘뜻으로 본 세계역사’’라는 글에서 “여기서 그(함석헌)는 보편적 인류역사 아니 더 나아가 자연사 속에 숨어 있는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물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김 박사는 “함석헌 철학의 첫째가는 화두는 ‘나’이다. 그에게는 ‘내’가 모든 것이었다. ‘내가 아담이다. 민족이 나다. 인류가 나다. 역사도 나요, 인생도 나다. 내 속에 다 있다.’(전집 2:101). 한 마디로 존재의 온 진리는 내 속에 있다. ‘참은 하나다. 我다. 한 아다. 나다. 그것은 이름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다. 그래 하는 말이 나다’>(전집 2:169) 라고 함석헌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단세포 생물은 생활기능도 간단하고 고등한 동물에 올라갈수록 복잡한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생리작용과 정신작용 사이에서도 정비례하는 관계가 있는 듯하다. 진화의 계단을 따라 생리작용이 복잡해지는 것은 복잡한 의식작용, 즉 더 넓고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나온 것이 의식 중에서도 가장 높고 큰 것인 인격이란 것이다.>(전집 2:86)
<막막한 우주에 사람은 단 하나이다. 그것이 나다. ‘다른 사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임의로 부릴 수도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나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나요, 내가 죽여도 좋은 건 나다. 나뿐이다.>(전집 2:159)

여기서 필자는 무신론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저 유명한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저서의 마지막 구절을 연상하게 된다. 그도 역시 광막한 우주 안에 홀로 서 있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왕국과 奈落의 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오로지 사람의 결단에 달렸다는 말로 그의 불후의 명작의 대미를 장식했었다.
그러나 유신론자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나는 개인 아니다. 나는 아버지 전체와 같이 있는 나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란 건 거짓 것이다. 천지간엔 없는 ‘다른 사람’이란 것을 보고할 때 개인이란 것이 있지 참 삶에 개인은 없다. 내가 살려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 개인주의지 전체를 섬기려고 짐을 내 등에 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향기를 채우려고 나를 제단 위에 불사르는 것은 개인주의 아니다. 이 날까지 역사는 언제나 개인 아닌 개인이 바치는 자기 희생의 피에서만 수혈을 얻어 멸망을 면해왔다. 모든 참 생명적인 혁명은 따져 들어가면 다 어느 가슴에서 나왔다. 삶 자체의 가슴에서 나왔다.>(전집 2: 159-160)

그런데 철학자 김상봉은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의 원리를 염두에 둘 때에만 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주에 사람이 단 하나라는 것은 데카르트식으로 말해 어떤 경우에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오직 생각하는 나의 존재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의심할 수 없이 참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나의 존재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함석헌이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서양의 근대 의식철학을 접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지만 나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다. 이는 함석헌 철학의 형성의 역사를 분명히 서술하기 위해 반드시 밝혀져야할 문헌적 과제일 것이다.”
나는 최근에 진화론 논의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진화고생물학자인 콘웨이 모리스(Simon Conway Morris) 교수의 ‘Life's Solution: Inevitable Human in a Lonely Universe’라는 저서를 읽었다. 이 저서에서 콘웨이 모리스는 “진화는 확률론적 그리고 결정론적 과정의 소산”이라고 말하면서 마지막 장에서 ‘진화신학’(A Theology of Evolution)을 논하고 있다. 함석헌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도 함석헌 철학의 형성과정을 서술하는 데 반드시 밝혀져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를 길고 긴 진화과정으로 보고 앞으로도 생명의 비약에 의한 진화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소위 전통신앙을 가진다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극히 배척하여 그것은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결코 固定이 아니다. 신앙은 그렇게 비겁한 것이 아니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은 적응이요, 통제요, 지도요, 소화요, 자람이다. 신앙은 자라기 위하여 항상 새로운 싸움을 요구하고 새로운 식물을 요구한다. 어린이의 미(美)를 고집하면 말라죽음을 면치 못한다. 과학에 대하여 자기를 멀리 세우는 신앙은 무덤 속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과학을 거부할 것이 아니요 수용할 것이다. 소화할 것이다…. 역사는 담대한 자만이 진보의 영예를 얻음을 가르친다. 신앙은 보다 높은 곳으로 자라기 위하여 새로운 것에 대하여 담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학 그것, 진화론 그것이 악한 것 아니다. 우리는 이 과학의 보자기 속에 든 여러 가지 동물을 담대히 소화함으로써 보다 깊은 세계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전집 9: 22~23)

김상봉 박사의 함석헌 사상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연구를 앞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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