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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과 철학
파인만과 철학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07.28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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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물리학상을 탄 파인만의 글을 보니 프린스턴대의 교수식당은 오는 순서대로 앉아 밥을 먹는다. 마치 해리포터 영화에서 보면 학생들이 식당에 들어오면서 순서대로 앉는 것과 같다. 자리를 비워놓지 않고 차례대로 채워 밥을 먹는 전통이다. 특히 음식이 차려져 있으면 이 방식은 매우 유용하다. 우리도 단체배식 때 많이 들어보았다. ‘자리를 채워 앉아주세요.’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다. 끼리끼리 앉으려는 성향이 짙은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앉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말’을 중시하는 서구 문명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그걸 ‘말 참 많네(Too much talkative!)’라고 할 테지만. 

프린스턴대 교수식당에서 중요한 것은 무작위로 앉았지만 여러 전공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데 있다. 나는 그런 상황을 피동으로 그리고 당위로 쓰지만(말을 ‘나누게 되고’, 말을 ‘섞어야 한다’) 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달리 말하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좋거나, 아니면 그럼에도 주제에서 안 밀려야 하는 모양이다. 

파인만이 엉뚱한 것은 유명하다. 동부가 아닌 서부에서 머문 것도 그렇지만, 연구소 시절에는 잠긴 비밀번호 열기를 즐겨하고 연구년에는 남미에 가서 춤을 배웠다. 그러나 삼바만 춘 것이 아니라 잉카 달력에 빠져 멋진 해석을 해낸다. 곳곳에서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사나이다. 내가 보기에는, 문제를 푸는 것도 멋지지만 문제가 눈에 띄는 것이 더 멋져 보였다. 남들에게는 별문제가 아닌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로 보이니 천재 끼가 넘친다. 정주영 회장에게도 돈이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니 훌륭한 사람은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교내식당에서 철학자와 대화를 나눈 파인만

그런 파인만에게도 강적은 있었다. 바로 철학자였다. 식당에서 오직 철학자들만이 그에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벽돌이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 철학 교수는 장광설을 늘어놓았고, 파인만은 어찌 그렇게 쉬운 이야기를 어찌 그렇게 어렵게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파인만은 철학자의 주장을 서너 가지로 정리한다. 그리고는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 파인만의 정리는 매우 좋았다. ‘벽돌이 있느냐’는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 인식론적 접근, 실재론적 접근, 유명론적 접근이 모두 다 담겨있었다. 내가 보기에 파인만은 철학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했다. 다만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지 신물이 났을 뿐이다. 파인만은 그래서 천상 물리학자일지도 모른다. 많은 접근을 넘어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물리적 접근만을 고집했으니 말이다. 

나는 파인만의 그 정리를 종종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철학을 공격하기 위해 나열한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너무도 잘된 정리였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제대로 된 적이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철학 내부에서조차 장자에게는 혜시가, 맹자에게는 양주와 묵적이, 양명에게는 주자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이, 칸트에게는 흄이, 루소에게는 볼테르가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에게는 크산티페가 있었다! 

타학문과의 만남은 필요하다. 가장 적대적인 상대가 가장 우호적인 동지일 수 있다. 내가 늘 떠들지만, 어영부영한 벗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된 적이 낫다. 훌륭한 적은 깨우침이라도 주지만, 이도 저도 아닌 친구는 술병만 축낼 뿐이다. 그래서 적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파인만이 고맙다. 

언젠가 고등과학원에서 물리학을 하는 친구가 ‘결정론’이 뭐냐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거 창조와 종말이 있고, 그 과정도 정해져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더니, ‘알겠네, 빅뱅이 바로 수도사가 만든 것’이란다. 창조의 현대적이고 물리학적인 어휘가 바로 빅뱅이었다. 큰 뻥!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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