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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2] 투옥, 투옥, 투옥… 일생을 걸고 투쟁한 평화주의자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2] 투옥, 투옥, 투옥… 일생을 걸고 투쟁한 평화주의자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7.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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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르쿠앵

스물두 살의 신병이 소속 연대와 함께 노동자 파업을 중단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파병되었으나, 파업자들에게 돌진하는 것을 거부하여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 것을 비롯하여 갖가지 육체노동은 물론 거지까지 경험하면서도 평생 평화주의 사상을 지킨 이유로 감옥에서 12년을 보낸 사람이 루이 르쿠앵(Louis Lecoin, 1888~1971) 말고 또 있을까? 그 비슷한 사람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이 땅에서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분단인가?

우리와 달리 프랑스를 평화 선진국이라고 착각할 사람들이 많을지 몰라 미리 말하지만 프랑스든 어디든 평화 선진국은 없다. 르쿠앵이 프랑스 중부의 셰르(Cher) 시골에 사는 매우 가난한 농장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을 때에 프랑스는 국수주의와 군국주의가 창궐한 나라였다. 특히 1871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패배한 뒤 프랑스는 적대감에 광분하여 초등학생 때부터 군인정신을 주입했다. 7명의 자녀를 둔 르쿠앵의 부모가 문맹이었고 르쿠앵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뒤에 그가 평화주의자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루이 르쿠앵(Louis Lecoin, 1888~1971
루이 르쿠앵(Louis Lecoin, 1888~1971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오로지 ‘끔찍한 비참’으로 기억되었고 그 뒤 인쇄소, 농장, 보육원 등에서 일하다가 열여덟 살에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첫 구금되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 들판에서 일했지만 살기 어려워 이듬해 파리로 갔고 그 때 장 조레스와 세바스티앙 포레 같은 아나키스트들과 처음으로 교류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이 전쟁은 노동계급에 대한 최악의 범죄입니다

 

1909년 10월에는 당시 스페인에서 총살당한 교육자 페레르(Francisco Ferrer)를 위한 시위에 참여하고 1년 뒤 군에 징집을 당한 뒤 파업 진압을 거부해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부터 민형사는 물론 군사재판 등 모든 종류의 재판에 회부되고 감옥살이를 반복하지만 권력 앞에서 무릎 꿇은 적 없는 그의 파란만장이 이어진다. 1912년 제대한 뒤 파리에 있는 아나키스트코뮤니즘연맹의 비서가 되었으나 곧 탈영을 조장하는 포스터를 인쇄하고 징집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 받는다. 1916년 석방된 뒤에는 동원명령을 거부하고 '평화를 강요하자!'라는 제목의 반전 선언문을 인쇄했다가 즉시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 선언문에는 에리코 말라테스타, 알렉산더 버크만, 엠마 골드만 등 35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서명했다. 르쿠앵은 1917년에 석방되었으나 다시금 군 소집에 대한 불복종으로 체포되어 군교도소에 들어가 단식 투쟁을 한다. 1917년 9월, 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징집 거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사람이 동포를 죽이는 것을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에 의해 촉발된 이 전쟁은 노동계급에 대한 최악의 범죄입니다. 나는 무기 요청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에 항의하고 있습니다. (중략) 군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군사화를 거부함으로써 나는 아나키즘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신념에 논리적이고, 이러한 사건의 추악함에 고통 받는 내 마음과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대해 내 양심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재판소에서는 프랑스 정부가 다른 전쟁 국가의 지도자들과 함께 인간학살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것을 연장하는 책임도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노동 계급이 자본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게 될 전투인 계급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혁명적 방법과 직접적인 행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 i Guàrdia,1859–1909)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 i Guàrdia,1859–1909)

 

1920년에 석방된 뒤에도 부대 복귀를 두 번 거절하여 다시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 일들로 인해 그는 평화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조합(CGT)에도 참여해 혁명적 노조운동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클레망소에게 총격을 가한 아나키스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나아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두 번의 싸움을 한다.

첫 번째는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인 부에나 벤투라 두루티, 그레고리오 호베르, 프란시스코 아스카소가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뒤 당시 프랑스를 방문한 스페인 국왕을 암살하고자 파리에 와서 불법무기 소지를 이유로 체포되었을 때, 르쿠앙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암살 사건을 이유로 아르헨티나 정부가 인도를 요구한 것에 대해 투쟁하여 그 세 사람을 석방하고 아르헨티나 정부에 인도하지 않게 한 것이었다.

두 번째 투쟁은 1927년 8월 미국에서 체포된 니콜라 사코(Nicola Sacco)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300만 명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그들이 체포되자 직후 파리에서 열린 미국재향군인회의에 위장 잠입해 세 차례에 걸쳐 "사코와 반제티 만세!"를 외쳤다. 이후 체포되었으나, 여론의 압력에 의해 1주일 만에 풀려났다.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왼쪽, Bartolomeo Vanzetti, 1888 ~ 1927)와 니콜라 사코(Nicola Sacco, 1891 ~ 1927)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왼쪽, Bartolomeo Vanzetti, 1888 ~ 1927)와 니콜라 사코(Nicola Sacco, 1891 ~ 1927)

 

 

70대에도 단식 투쟁, 노벨상 후보는 마틴 루터 킹에 양보

 

1936년 르쿠앵은 스페인 시민전쟁이 터지자 스페인 인민정부를 지원하는 위원회를 만들었고 이는 곧 반파시스트국제연맹(International Anti-Fascist Solidarity: SIA)으로 확대되었다. 이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반전 팸플릿을 만들어 10만부를 유포하고 알렝과 장 지오노를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즉각적인 평화’(Paix immédiate)를 요구하는 선언에 서명한 탓으로 1943년까지 감옥에 갇혔다.

1948년 그는 <인간의 옹호>라는 월간지를 창간하고 프랑스 해방 이후 자행된 야만적인 숙청과 지속적인 탄압에 저항해 모든 수감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1957년부터 앙드레 브르통, 장 콕토, 장 지오노, 알베르 카뮈, 베르나르 뷔페 등과 함께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법 제정 운동을 시작했고, 그 운동을 위해 1958년에 주간지 <자유(La liberté)>를 창간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블라맹크, 뷔페, 동겐 등 70여명의 화가들도 그림을 제공했다. 1958년 9년간을 감옥에 갇힌 거부자를 포함하여 5년 이상 수감된 9명은 석방되었으나 알제리전쟁을 등을 이유로 정부가 계속 입법을 거부하자 1961년 74세의 고령임에도 22일간의 단식투쟁을 시작해서 1963년 말 프랑스 최초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법이 제정되게 했다. 당시 “작은 남자는 권력과 군국주의의 무게를 이겨냈습니다. 역사는 프랑스에서 드골 장군의 권위 하에 양심적 병역 거부자 법령이 제정 된 것으로 유지 될 것입니다.”라는 평이 니왔다. 미셸 드브레의 지도하에 의회에서 치열하게 논의되었으나 내용은 상당히 수정되어 르쿠앵이 바란 바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1957년 당시 구속된 90명을 비롯하여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석방하게 했다.

르쿠앵은 1964년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되었지만 마틴 루터 킹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1971년 83세로 죽을 때까지 ‘아무런 조건 없는 완전한 군축’을 위한 마지막 싸움을 했고, 죽기 1년 전에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10년부터 1971년 사망까지 60년 동안 변함없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신이 수행한 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르쿠앵은 아나키스트, 아나코-신디컬리스트, 그리고 반군국주의 평화주의자라는 세 가지 신념과 행동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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