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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근대학’으로 다시 살아나는 현진건과 이상화
‘지역의 근대학’으로 다시 살아나는 현진건과 이상화
  • 양진오
  • 승인 2021.07.21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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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거리의 대학 16

“우리는 좀 더 정밀하게 지역의 근대를 복기해야 한다. 
현진건 문학을 비롯한 식민지 시대 문인들의 문학이 죽은 자들의 문학이 아니라 
산 자들의 문학으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 쉽게 답변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다.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엔 위인들이 참 많았다. 아마도 나는 위인전을 읽으며 감명받거나 나도 이 위인처럼 살아야지 다짐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러나 여느 아이처럼 나는 위인보다는 친구들을 더 찾는 평범한 소년으로 자랐다. 다른 버전의 위인을 만난 건 198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가면서다. 

진학한 학과가 국어국문학과여서일까, 나는 식민지 시대의 문인을 위인의 수준으로 학습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현진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등이 그들이다. 나는 이들을 부조리한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고결한 문인으로 학습하며 존경했다. 그런데 이 학습이 오도된 학습임을 알게 된 건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였다. 특히나 지역 원도심 기반 인문학을 실천하는 북성로대학 프로젝트를 계기로 그간의 근대문학 학습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반성은 이렇게 시작될 수 있다. 먼저 현진건을 예로 들어 말해 보기로 하자. 현진건은 흔히 식민지 민중의 고단한 삶을 아이러니 기법으로 탁월하게 서술한 작가로 정의된다. 이와 같은 정의는 익숙하다. 아주 익숙하다. 익숙해서 감명의 울림이 없다. 이건 관행이다. 식민지 시대의 문인을 정의하는 표현에는 민족과 민중 개념이 관행처럼 삽입되어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이 관행을 의심하지 않는다.

너무나 익숙한 ‘식민지 문단을 대표하는…’

한편으로 현진건은 대구의 소설계와 학계 등에서 ‘대구가 낳은’ 향토 작가로 추앙된다. 이와 같은 추앙 역시 익숙하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소위 향토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기리는 문학관, 문학비가 적지 않다. 이들 문학관과 문학비는 해당 문인과 향토의 관계를 운명의 무게로 증언하거나 기록한다. 요컨대 현진건은 거시적 차원에서는 식민지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미시적 차원에서는 대구를 대표하는 향토 작가로 정의되고 추앙되는 실정이다. 현진건만 이렇지는 않다. 적지 않은 식민지 시대의 문인들이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에서 이중적으로 정의되고 추앙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구태의연한 정의와 추앙의 반복이 해당 문인의 삶과 문학을 극도로 추상화한다는 데 있다. 식민지 민중의 고단한 삶을 서술하는 현진건 문학이 오늘날 왜 의의가 크며 대구를 대표하는 현진건 문학이 오늘날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를 본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진건과 그의 문학은 현재적 의의를 이야기하지 않는 추상적 기호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정밀하게 지역의 근대를 복기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현진건 문학을 비롯한 식민지 시대 문인들의 문학이 죽은 자들의 문학이 아니라 산 자들의 문학으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진건과 이상화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구에서 태어났다. 현진건이 1900년생이고 이상화가 1901년생이다. 공교롭게 두 사람 모두 1943년 세상을 뜬다. 두 문인 모두 동아시아의 격변기에 태어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승한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강제하는 식민화를 이 시기에 집요하게 추구한다. 두 전쟁의 여파로부터 대구가 자유롭지는 않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영남의 전통 도시 대구를 식민 도시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때 이들이 태어난 거다. 말하자면, 현진건과 이상화는 전통 도시 대구가 식민 도시로 도시 위상이 뒤바뀔 때 고고지성을 울리며 세상에 태어난 거다. 

현진건이 신혼살림을 하였다는 대구 중구 인교동 인근의 골목. 대구 중구 계산동과 인교동은 현진건, 이상화, 백기만이 죽마고우로 성장한 원도심이다. 사진은 2021년 1월 15일 촬영. 사진=양진오

그들은 어떻게 근대적 주체로 성장하였을까

두 차례 국제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영남 내륙 대구에는 일본 이사청이 설치되고 헌병대가 주둔하며 일본인 식민자의 거리 북성로가 탄생한다. 이들은 전통 도시 대구의 요지에 그들의 식민 도시를 만든다. 이렇게 시작된 식민 도시 대구가 1930년대에는 지금의 대구 남구로까지 확장된다. 대구의 도시적 원형은 이렇게 식민지 시대에 조형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근대적 주체 현진건과 이상화가 이 시기에 괴로우면서도 뜨겁고 뜨거우면서도 서늘한 청춘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대구 원도심도 그렇지만 원도심은 지역의 근대가 중첩적으로 교차 누적되는 장소이다. 지역 원도심의 외형적 이미지는 대개 누추와 빈곤을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지역 원도심이 바로 지역 도시 탄생의 스토리가 집적된 장소이며 우리가 그간 위인처럼 받들던 근대적 주체를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활동지이기도 하다. 이들을 식민지 시대와 향토 개념으로 정의만 할 게 아니다. 이들이 지역의 근대와 어떻게 연계되어 근대적 주체로 탄생, 성장하게 되었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에 문을 연 라일락 뜨락 1956 카페. 대구 서성로에는 이상화 시인의 생가와 시인의 가문이 애국계몽기에 운영한 사숙 우현서루 터가 있다. 사진은 2020년 7월 31일 촬영. 사진=양진오

현진건, 이상화 모두 대구의 대표적인 원도심인 계산동과 관련이 깊다. 현진건은 계산동 출신이다. 이상화가 말년에 거주한 고택은 계산동에 있다. 계산동은 예로부터 대구에서는 뽕나무골로 불렸다. 계산동의 ‘계’가 뽕나무를 일컫는다. 뽕나무골 일대는 대구 근대를 이끈 천재의 삼각지대로도 불린다. 현진건, 이상화만이 아니라 대구 근대 미술을 이끈 화가들의 고향과 활동지가 계산동이었다. 경성과는 다른 문법으로 대구의 근대를 이끈 이들의 활동 장소가 바로 계산동이다. 

경성과는 다른 문법의 ‘그 문법이’ 앞으로 더 연구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다. 언제까지나 이들을 싸잡아 식민지 시대의 누구, 우리나라의 누구라고 정의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우리 향토를 빛낸 이런 식으로 이야기되지 않아야 한다. 현진건, 이상화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근대적 주체들의 생애와 활동이 지니는 의미를 지역의 사정과 연계하여 연구할 수 있겠다. 이 작업을 일컬어 지역의 근대학으로 부르기로 하자. 원도심의 거리, 장소, 인물과 연계된 지역의 근대학이 깊이 있게 연구될 때 현진건, 이상화는 우리들의 이웃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양진오 대구대 교수·한국어문학과
한국 현대문학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대구 원도심에 인문학 기반 커뮤니티 공간 ‘북성로 대학’을 만들어 스토리텔링 창작, 인문학 강연 및 답사, 청년 창업 컨설팅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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