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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실학자들, 우주의 중심을 논하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 우주의 중심을 논하다
  • 송상용
  • 승인 2021.07.15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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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역사 속의 시간, 시간 속의 역사』 고석규 지음 | 느낌이있는책 | 424쪽

 

시간, 아무도 모르지만 시간의 계량화는 발전
시간의 노예 벗어나려는 노력이 창조성 이끌어

             
한국사학자 고석규 목포대 명예교수의 신간인 이 책은 동서양의 철학, 역사, 과학을 아우르는 야심 찬 책이다. 그의 야심이 성공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목표에 이르기에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시간의 철학이다. 5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의 ‘모른다’는 답부터 나온다. 우리나라에 철학자는 많지만 시간을 주로 연구한 철학자는 몇 안 된다. 시간이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것이 역사다. 시간에 대한 다른 생각이 다른 역사를 만든다.

1부 ‘시간과 역사의 여러 모습’ 중 2장은 역법의 세계사다. 기원전 46년 로마제국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때 채택된 율리우스력은 1582년까지 시행되었고 그레고리오(Gregorio) 13세 교황 때 그레고리오력으로 바뀌었다. 역법을 바꾼 것은 부활절을 계절과 일치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3일 같은 날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두 사람의 나라는 다른 역서를 썼기 때문에 생일은 열흘이나 차이가 난다.

3장은 기계시계의 역사다. 시간 측정은 천체의 주기적인 순환운동에서 구했으나 이를 정확히 나누어 측정하기는 어려웠다. 이것을 간단하게 해준 것이 기계시계였다. 기계시계는 13세기말 제작되었다. 그것은 탈진기의 발명, 스프링을 이용한 태엽시계, 크리스티안 하위헌스(1629∼1695)의 전자시계 발명으로 이어졌다. 기계시계의 눈부신 발전은 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계량화는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왔다.

4장은 시간의 사회사다. 16세기 프랑스 작가 라블래(Rablais)가 “시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인간이 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인간은 시간에 얽매여 노예처럼 살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세상은 시계로 가득 차 있고 시계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한탄이 나왔다.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살던 삶은 기계가 이끌어 가는 산업사회에 들어오면서 크게 달라졌다.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 이 말은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좌우명이다. 참 된 느림은 오히려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창조의 시간이며 기회의 시간이다.

 

시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인간이 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2부 ‘조선의 역서와 시계’는 최근에 나온 한국천문학사 학자들의 논문들을 읽고 쓴 것이 돋보인다. 그러나 원로 과학사학자들의 중요한 연구들이 빠져 아쉽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뒤늦게 한국과학사 연구를 시작한 전상운에게 1962년 예일대에서 일본 여성 야기 에리(八木江里)의 편지가 날아 왔다. 영국의 과학사학자 프라이스(Derek Price)가 연희전문 교수 루퍼스(W. C. Rufus)의 논문 「한국의 천문학」(1936)에 나오는 조선시대 천문시계 선기옥형(璇璣玉衡)에 대해 알고 싶어 하니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전상운은 인촌 김성수가 선기옥형을 고물상에게 싸게 사서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김성수의 부인은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알려 주었다. 전상운은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논문은 그 해 『고문화』에 나왔고 일본과학사학회지에 요약이 실렸다. 

조선시대 천문시계 선기옥형(璇璣玉衡)은 중국, 아랍, 서양의 기술을 종합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다. 사진=느낌이있는책 

조지프 니덤(1954~1993)은 거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7권 20부, 1954∼현재 케임브리지대 니덤연구소에서 공동집필 중)에서 1669년 이민철, 송이영이 만든 선기옥형이 중국, 아랍, 서양의 기술을 종합한 아시아 시계 전통의 마지막 대표작품이라고 하면서 세계의 모든 과학박물관이 그 모조품을 전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덤은 루 궤이전 (Lu Gwei-djen, 魯桂珍), 콤브리지(John H. Combridge), 메이저(John S. Major)와 함께 『The Hall of Heavenly Records. Korean Astronomical Instruments and Clocks 1380-1780』(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을 냈고, 한국판은 『조선의 서운관 : 조선의 천문의기와 시계에 관한 기록』(이성규 옮김, 살림, 2010)으로 나왔다.

1960년에 태어난 한국과학사학회는 1979년에야 『한국과학사학회지』 창간호를 냈다. 거기에 박성래의 「홍대용 지전설의 뜻」이라는 영문 논문이 실려 있다. 18세기 중반 서양 과학을 받아들인 홍대용 등 조선의 실학자들은 중국, 일본에는 없는 지전설을 믿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처음 중국에 전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었다. 그 다음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로 바뀌었는데 갈릴레오 재판이 있었던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절충설인 티코(Tycho Brahe) 체계를 가르쳤다.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다시 태양은 행성들을 거느리고 지구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었다. 과학적으로는 가치가 없었지만 18세기에 일본을 거쳐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들어올 때까지 티코 체계는 조선 학자들을 사로잡았다.

홍이섭은 『조선과학사』(1944·일본어, 1946·한국어)에서 홍대용의 지전설을 독창적인 것으로 보았다. 타무라 센노스케(田村專之助), 시쩌쭝(席泽宗), 최익한. 정진석, 정성철, 김창원, 홍기문(조선)은 홍이섭을 지지했으나 야부우치 키요시((薮内 清)와 손영종(조선)은 회의적이었고 천관우, 전상운(한국)은 홍이섭 편을 들다가 서양의 영향을 인정했다. 박성래는 홍대용이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은 예수회사들이 틀린 가설이라고 가르친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홍대용의 발견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박성래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했다. 내가 1987년 케임브리지대 과학사ㆍ과학철학과 객원연구원으로 있을 때 니덤은 나를 키스 콜리지 멤버로 만들어 주었고, 우리는 하이 테이블에서 매주 만났다. 나는 시쩌쭝에게서 베이징 국제 천문학회에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나는 한국 천문학사 전공이 아니지만 런던대 도서관에 가서 북한학자들의 논문들을 읽고 박성래의 논문을 주로 참고해 「한국에서의 티코 브라헤(Tycho Brahe in Korea)」를 발표했다. 발표 요지는 『VISTAS IN ASTRONOMY』(VOL. 31, 1988, 819-821)과 『Acta historiae rerum naturalium necnon technicarum』(Vol.8, 2004, 265-267)에 실렸다.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 / 과학사·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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