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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 지율 단식이 던져준 철학적 화두
시각 : 지율 단식이 던져준 철학적 화두
  • 김영건 계명대
  • 승인 2005.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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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合意와 개인 의지의 딜레마

단식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산 하나를 보존하거나 본 적도 없는 도롱뇽들을 위해서 단식하지 못한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 어떤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며칠 안에 적당히 끝낼 단식 따위는 능히 할 수 있다.


지율 스님의 단식을 놓고 말이 많다. 어떤 이는 개인의 힘에 굴복된 국가의 형편없는 모습을 읽고, 원리주의자의 이기주의를 읽어내고 있다. 또 환경운동의 절실함과 생명가치의 중요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실존적 선택이 주는 진지한 절박함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 사회는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이런 실존적 사건에 대해서 구경꾼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단식은 냉소적 비웃음이나 지나친 동정의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만약 사회가 개인의 자유로운 의견이 국가에 반영될 정도로 합리적인 곳이라면, 단식은 그렇게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합리적이지 못한 우리의 과거는 단식에 어느 정도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여전히 우리가 합리적이지 못함에도, 이런 구도가 깨졌다는 것이다. 이제 단식은 의로운 개인과 부당한 집단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자유스러운 취향의 선택처럼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왜 단식까지 해서 우리를 괴롭히는가”라는 반문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단식의 목적과 동기는 사라지고 오직 수단만이 부각된다. 생명을 볼모로 삼아 목적을 이루려는 반생명적인 행위로 간주되거나,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려는 선전 행위로까지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단식의 목적과 동기가 진정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라면, 그가 죽든 말든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지율 스님의 단식은 단지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환경과 개발, 생명적 가치와 경제적 이익의 첨예한 대립의 한가운데 서있다. 지율 스님의 단식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는 어떤 합리적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짜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짜증은 서로 합의한 약속은 비록 그것이 나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해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요구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현상의 절차와 제도를 추상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절차와 제도가 적절하게 제 기능을 잘 하고 있는 지 자문해 보아야 할 때다.   

김영건 / 계명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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