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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_체계와 무지
문화비평_체계와 무지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5.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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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결성된 아파트 입주민 대표자 회의의 첫 공지는 관리비의 내역이 그 실제와 다르다는 고발이었다. 마치 그 차액에 대한 입주민들의 '무지' 속에서 아파트 '체계'의 비밀이 서식했다는 듯이, 그 공지문은 겨울바람이라도 맞잡고 싸울 태세로 제법 격앙돼 있었다. ‘그때 그 사람’(임상수 감독, 2005)은 유신 권력의 '체계'가 그 권력의 심장부에 대한 국민의 '무지'에 의탁해 왔다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비록 벌거벗은 임금님의 알몸이 만천하에 훤히 보이더라도, 백성들의 '무지'를 강요해야만 그 알몸의 '체계'는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전형을 이루면서, ‘소송’(카프카)의 K는 아버지라는 '체계'에 의해서 죄없이, 그리고 '무지' 속에서 심판받는다.

만하임의 문제의식에 의하면, 어느 '체계'의 公知와 생활세계의 일상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유토피아의 충동이 번식한다. 이론상, 아파트 관리비가 그 실제와 일치하고 정권이 완벽한 대국민적 투명성을 유지한다면 이데올로기도 유토피아도 힘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론에 틈이 생기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속의 본질이고, 환상의 '체계'와 '무지'의 정치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될 것이다.

만하임이 허위의식이라고 불렀던 이 환상의 '체계'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무지'가 우리의 良識이자 우리의 평화가 될 수 있다는 부정적 묵시록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심지어 '무지'가 우리의 존재론적 기반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섬뜩한 현실과 마주하는 체험이다. '체계 바깥은 없다'는 선언에서 간취할 수 있듯이, '무지'는 이처럼 '체계'와 비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허위의식의 보편성, 기계성, 무의식성, 그리고 擬似자연성을 분석하는 이론가들의 생각은 이미 고물상을 이루고 있다. ‘1984년’, ‘멋진 신세계’, 그리고 ‘뉴 로맨서’ 등의 문학도 '체계'의 정통이 무의식화돼 가는 과정을 통해 허위의식의 변천사를 엿보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좌파 이론들이 말해온 허위의식에서 불필요한 부분이 바로 의식이라는 부르디외의 비판적 지적은, '체계'와 '무지'가 만나는 방식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음을 알린다. 이를테면, 전두환 '체계'에서처럼 우민화 정책같은 방식을 통해 '무지'의 장막이 비로소 드리우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지성과 계몽이 이데올로기로 변질하는 이른바 계몽의 역설적 변증법이 우리의 일상이 됐다는 것이다.

'알면 다쳐!'라는 시쳇말은 인류사에 명멸한 모든 '체계'가 생존하는 방식을 요약한다. 실은 신학과 형이상학조차도 동일한 이치 위에 구축된 건축이다. '신을 보는 자는 죽는다'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바로 이 건축적 '체계'의 구성원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정령숭배와 다신교적 컴플렉스를 벗어나 '체계'를 이룬 일신교들의 형상파괴주의가 공히 증거한다. 아니, 종교와 씨름했던 칸트의 물자체(Ding-an-sich) 역시 '무지'의 형이상학적 '체계'가 간직해야 했던 盲點에 다름 아니다. 사실 영미 철학자들은 이 맹점을 확대해석해서 관념론 일반을 폄하했던 것이고, 거꾸로, 칸트 이후의 독일관념론자들은 '무지'가 없이도 '체계'가 작동할 수 있다고 믿은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우리 사회의 층층켜켜에 똬리를 튼 그 모든 父權的 '체계'들 역시 어떤 '무지'에 근거해 있다; 더불어, 베네딕트나 말리노프스키 등이 보고하듯이, 부권적 오이디푸스와 무관한 모계제 사회의 '체계' 역시 父性에 대한 생물학적 '무지'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은 극히 흥미롭다. 혹은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체계'는 '무지'와 오래 同棲하기 위해서 지식의 환상을 조금씩 흘리고 다니기도 할 것이다. 혹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적 지배의 '체계'는 그 지배의 효과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다. 혹은 지라르의 희생제의론에서처럼 모든 제의적 반복의 '체계'는 초석적 폭력이라는 원체험에 대한 '무지'에서 반복강박적으로 연역된다. 혹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이 시사하듯이, 문명의 '체계'는 억압과 '무지'를 그 값으로 요구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관료화에 대한 베버의 논의가 잘 보여주듯, 인간의 근현대적 일상은 그 일상의 '무지' 속에서 '체계'화된다. 마찬가지로, 물고기의 浮遊가 부레라는 빈 것에 의지하듯이 뭇 '체계'들의 생존은 우리들의 '무지'에 의지한다. 그렇다, 알면 다친다. 그러나, 모르면 썩는다. (그래서, 알면서 모른 체 하기인 것!)

김영민 / 한일장신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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