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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해빙의 논리, 한국과 유고슬라비아의 대중문화 교류
문화 해빙의 논리, 한국과 유고슬라비아의 대중문화 교류
  • 김성희 숭실대 한국기독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승인 2021.07.07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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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North Face 4
2011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오프닝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2011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오프닝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냉전 시대 한국은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당연히 인적・물적 교류도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자재나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공산국가들과 무역을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고, 공연 등의 문화 교류의 기회도 왕왕 있었다. 정치를 배제한 일에서는 가끔 예외가 적용되곤 했던 것이다. 

특히 당대의 식자들에게 ‘문화 해빙’이라 불리며, 동유럽과의 문화 교류는 특별한 주목을 받곤 했다. 음악인들이나 예술가들이 오가는 일 정도야 괜찮지 않겠느냐는 인식이 꽤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신의 끝자락, 혹은 권력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79년과 1980년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문화 관료와 음악인들이 국내에 들어와 가요제 조직에 도움을 주거나 공연을 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사실 축제의 나라였다. 연방공화국이던 유고슬라비아의 특성상,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 공화국마다 가요제가 한두 개씩은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공산국가 중에서는 가장 먼저(1961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했을 정도로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음악 축제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많은 노래 축제 중, 크로아티아의 달마시아 지방에서 열리는 ‘스플리트(Split) 가요제’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이 노래 축제를 처음 조직한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의 알만도 모레노(Armando Moreno, 1921~2005)라는 문화 관료였다. 그는 크로아티아 지진 피해의 복구를 위해 1967년 달마시아 해변에서 가요제를 성대히 개최하고,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 유럽의 음악가, 사업가들과 손을 잡는다. 그래서 조직한 단체가 ‘국제가요제연맹(FIDOF)’이었다. 1970년대에는 세계 각지에서 국제가요제가 개최되는데, 알만도 모레노의 국제가요제연맹이 이들 축제를 조직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었다. 

알만도 모레노는 1979년과 1980년 두 차례나 서울에 왔었다. 1979년 TBC 세계가요제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 그의 첫 내한이었다. 당시 주최측이었던 <중앙일보>는 그를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세계 관광업계의 실력자라고 묘사했다. 떠들썩한 방식은 아니었지만, 한국 언론은 유고슬라비아 인사가 한국에 와서 가요제의 심사위원을 본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도했다. 모레노가 TBC에만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12.12 사태의 바로 전날이었던 12월 11일에는 당시 MBC와 <경향신문>의 사장이었던 이환의(훗날의 백제예술대학교 설립자이자 국회의원)를 만나 국제가요제연맹을 통해 그가 MBC 서울국제가요제에도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에 한국에서 열렸던 세계・국제가요제에 유고슬라비아의 문화 관료가 도움을 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 간 교류가 막혀있던 냉전 시대, 반공이 국시였던 군사독재 시대에도 진영을 초월해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곤 했던 것이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1980년 내한을 마지막으로 모레노에 관한 뉴스는 국내 언론에서 사라진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헝가리 밴드 ‘뉴튼 패밀리(Neoton Familia)’가 내한하기까지 6년간 동구권 대중음악인들의 공연도 없었다. 1981년을 마지막으로 TBC와 KBS가 주최했던 세계가요제는 폐지되고, 1982년부터 MBC는 서울국제가요제를 개최하는 데 국제가요제연맹(FIDOF)의 도움에만 의존하지 않게 된다(빌보드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세계 음악시장과의 접점을 찾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음악계가 세계와 소통하게 법을 배우게 된 데에는 크로아티아의 알만도 모레노와 유고슬라비아의 국제가요제연맹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한국인들은 크로아티아를 많이 찾았다. 스플리트 근처에 영국의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촬영지가 있는 데다가, 국내의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던 ‘꽃보다 누나’의 촬영지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 방문객들의 증가와 더불어 지난 2018년 크로아티아 정부는 서울에 대사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물론 전염병과 함께 한국인의 크로아티아 방문은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해 크로아티아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문 대통령의 크로아티아 국빈방문이 소원이라고까지 말했다. 이 전염병이 물러나면 한국과의 교류, 즉 한국인의 크로아티아 방문을 재개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한 것이었다. 

엄혹하던 냉전 시대에도 동과 서, 동유럽과 한국은 이어져 있었다. 전염병이 물러나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이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김성희
숭실대 한국기독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현재 숭실대 한국기독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문학과 영어논문쓰기 등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학이론, 북한문학, 동아시아 냉전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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