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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0] 빠삐용의 실제 모델이 된 아나키스트 이야기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50] 빠삐용의 실제 모델이 된 아나키스트 이야기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6.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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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망 뒤발

2018년 새 「빠삐용」이 개봉되었지만 1974년에 본 스티브 멕퀸과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빠삐용」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앙리 샤리에르(Henri Antonin Charrière, 1906~1973)가 아프리카 기아나의 악마섬에서 탈출한 자신의 투옥 경험을 쓴 원작소설에 기초했지만 그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샤리에르보다 40년 전에 실제로 악마섬에서 탈옥한 사람이 있어서 그의 이야기도 「빠삐용」 제작 시에 참고가 되었는데, 샤리에르의 소설도 그 이야기를 참고한 것이었다. 바로 ‘악마섬의 아나키스트’라고 불린 클레망 뒤발이다. 영화에서 빠삐용이라는 별명의 샤리에르는 평범한 청년으로 살인사건이 벌어진 곳 부근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살인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지만, 뒤발은 아나키즘 혁명의 대의를 위해 부잣집을 방화한 죄목으로 투옥된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종신형을 받고 악마섬에서 14년 동안 20번 이상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1901년에 성공하여 뉴욕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살다가 1929년 회고록을 내고 1935년 85세로 죽었다. 「빠삐용」은 뒤발의 이야기를 탈정치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빠삐용'(1973)
영화 '빠삐용'(1973)

 

그런데 악마섬에 갇힌 죄수들은 드레퓌스를 비롯하여 대부분 정치범이었다. 그들은 별도의 교도소 시설이나 간수 없이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허용되었지만, 악마섬은 그 이름처럼 바다와 정글로 가로막혀 탈출이 어려웠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사망률이 75%에 이르기도 했다. 섬 주변의 파도는 모두 섬 방향으로만 흘러서 배를 띄워도 대양으로 향하지 못하고 다시 섬으로 회항될 수밖에 없어 사실상 탈출이 불가능했다. 「빠삐용」에 나오는 형무관이 "기아나의 처형장은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한 형무소다"라고 까지 할 정도로 그곳의 환경은 참담했다. 따라서 그곳에서 탈출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는데, 빠삐용은 여덟 번째 시도 만에 코코넛 포대를 이용하여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소설에 나오지만 그가 정말 탈옥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프랑스 정부는 1953년에 악마섬을 유배지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해 폐쇄되었다.

 

“나는 강도가 아니라 정의를 되찾아오는 사람”

 

뒤발은 스무 살에 보병 대대의 일원으로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가 크게 부상을 입고 4년을 병원에서 보냈다. 퇴원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는데 고작 80프랑을 훔친 혐의로 1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뒤발은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아나키스트는 장 그라브였다. 그는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총을 사용한 폭력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프랑스만이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폭력적 저항이 생겨났다. 프랑스에서도 개인적인 범죄행동이 1886년 10월 뒤발이 파리의 저택에 침입하여 1만5천 프랑을 훔치면서 실수로 집에 불을 낸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클레망 뒤발(1850~1935)
클레망 뒤발(1850~1935)

 

그는 2주 후에 체포되면서 경찰관을 찔렀지만 경찰관은 죽지 않았다. 뒤발은 “아나키 만세!"라고 외치면서 법정을 혼란에 빠트리고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뒤에 악마섬 유배로 감형되었다. 1886년 11월 아나키스트 신문 <르 레볼테(Le Révolté)>에 실은 편지에서 그는 “절도는 노동 계급을 희생하여 사는 사람들이 사람을 착취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내가 저지른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인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정당한 보상이었고, 그 돈은 글과 행위를 통해 혁명적인 선전, 즉 오랫동안 속아온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신문과 전단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아픈 사람들에게 치료법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라고 했다. 그리고 “낡은 세계의 사악한 기계가 사라질 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더 공정한 운명을 찾을 수 있는 기관에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존재하지는 않지만 아나키즘적 코뮤니즘 안에 있다. 아나키 상태는 모든 권위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 상태는 가장 큰 사회적 상처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고, 자기 동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사람은 차례로 전제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반면 앞으로 와야 할 코뮤니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코뮤니즘에서 사람은 자신의 기술과 강점에 따라 사회에 기부하고 필요에 따라 받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성격, 기술, 친화성에 따라 서로를 찾고, 허영심과 어리석은 자존심에서 벗어나 최고의 기능을 하는 그룹을 예로 들어 동료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유용한 걸작이 나올 것이다. 사람들의 지능은 더 이상 자본에 불과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더 이상 독재적인 권위의 멍에 아래서 개인 재산을 자유롭게 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룹은 방해 받지 않고 상호간에 제품을 교환 할 수 있다. 자치에 대해 배우고 좋게 느낄 때, 그들은 연합하고, 오직 하나의 법, 즉 연대와 상호의 법을 아는 모두-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함께 연합한 대가족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뒤발은 자신을 “강도가 아니라 강도를 당한 사람, 정의를 가져 오는 사람,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를 가지고 과업에 헌신하는 진실한 혁명가이다. 돈이 전쟁의 신경인 현대 사회에서, 나는 이 고귀하고 정당한 원인에 봉사하기 위해 돈을 조달하고자 내 힘에 있는 모든 일을 하여 모든 폭군과 그로 인해 겪은 박해를 제거할 것이다.” 이어 그는 노동 현실의 참상을 설명하면서 “나는 사유재산의 적이며 내가 프루동과 함께 재산이 절도라고 말한 것은 오래 전부터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 혁명 만세, 아나키 만세!”로 끝을 맺었다.

 

저항과 테러 사이, 격동의 20세기 초

 

뒤발을 이어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폭력행동에 가담했다. 이탈리아인 비토리오 피니(Vittorio Pini, 1870~1914)도 강도질에 가담한 아나키스트로 1890년 11월에 재판에 회부되자 뒤발처럼 자신의 행동은 저질의 강도질이 아니라 부르주아가 착취한 부를 교정하여 되돌려 받는 사회적 목적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20년 노동형을 선고받고 악마섬에 갇혔다.

아나키스트들의 테러리즘도 프랑스 밖에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황후와 이탈리아 왕이 각각 1898년과 1900년에 살해되었고, 1910년에는 미국 대통령이 총격을 당했다. 1913년에는 프랑스에서도 재연되었다. 즉 슈티르너주의자이자 은행강도인 쥘 보노(Jules Bonnot, 1876~1912)와 그 일당이 회사원들을 습격하고 공증인 사무소와 은행 등을 습격하여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사살되었다. 그의 생애는 2006년 「호랑이 여단(Les Brigades du Tigre)」 등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 영화는 1974 년에서 1983 년 사이에 제작 된 프랑스 TV 시리즈 드라마에 기초한다.

 

영화 '호랑이 여단'(2006)
영화 '호랑이 여단'(2006)

 

한반도에서도 아나키스트 테러활동이 생겨났다. 1923년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을 위한 것으로 ‘의열단선언’으로도 불린다. 1925년 무렵부터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의열단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테러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신채호는 1923년경에 결성된 테러단체인 다물단의 선언문을 작성해주었다. 그 뒤에도 1926년경의 북경흑료구원회, 1927년의 무정부주의동방연맹, 1928년의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등이 결성되면서 중국에 있는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테러활동이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신채호 자신도 1928년 화폐위조 운반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구속되어 감옥에서 죽었다. 이어 1930년대에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과 그 산하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 그리고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합작한 항일구국연맹, 맹혈단 등이 활동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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