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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9]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의 만남, 체제를 공격하는 범죄자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9]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의 만남, 체제를 공격하는 범죄자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6.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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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숄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테러리즘으로도 나타났다. 사회는 테러리스트들을 범죄자로 보았으나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재판관이고 사형집행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은 1892년부터 2년간에 그쳤다. 그 시작은 1891년 5월1일 파이 근교의 르바루아(Levallois)에서 있었던 시위에 대해 경찰이 그 주모자인 3명의 아나키스트들을 선술집인 클리시(Clichy)에서 체포하면서 한 사람이 부상당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검사는 그들에게 사형을 언도했으나 부상자는 배심원에 의해 무죄로 석방되고 다른 두 명은 장기징역에 처해졌다.

 

라바숄(Ravachol, 1859~1892)
라바숄(Ravachol, 1859~1892)

 

이 사건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뒤에 라바숄(Ravachol, 1859~1892)로 더 유명해진 프랑소아 클라디우스 쾨닉스틴(François Claudius Koenigstein)을 분노하게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부터 가족을 부양해야 해서 염색공으로 일하며 아나키스트가 된 그는 술집에서 아코디언을 켜는 가수이기도 했는데 그 노래 중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도 있었다.

 

평등을 확립하려면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이 필요해

부르주아를 가루로 부셔라

그러면 전쟁을 하는 대신

우리는 우애를 가질 거야

 

1891년 라바숄은 90세의 수전노를 죽이고 많은 돈을 훔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자 “내가 죽였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려는 것이자 아나키즘 운동을 돕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민의 행복을 위해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아나키즘운동에 얼마의 돈을 주었는지 불명하지만 클리시 사건으로 투옥된 사람들의 가족에게 돈을 준 것은 분명하다. 여하튼 그는 탈옥하였으나 클리시 사건의 검사와 재판관이 사는 곳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여 다시 구속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의 신체를 희생하였다. 내가 더욱 싸운다면 그것은 아나키스트의 이상을 위해서이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언젠가 누군가가 복수할 것을 알고 있다.”

 

반동과 범죄, 테러와 혁명 사이에서

 

복수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다이너마이트 폭파 4일 뒤에 파리의 어느 부대에서 폭발사고가 생겨났다. 이어 그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기 전 날, 그가 체포된 레스토랑에서 또 하나의 폭탄이 터져 주인과 손님들이 죽었다. 그 범인인 테오둘 무니에(Théodule Meunier)는 라바숄과는 전혀 다른 인간형이었다. 가구상인 모범적인 청년으로서 우수하고 정직한 노동자로서 동료로부터 “혁명적 계몽가의 전형으로, 금욕주의자이자 공상가인 그의 구도는 생쥐스트와 같이 목적에 열정적으로 향하는 무자비한 태도였다.” 라바숄의 거친 성격은 무니에와는 무관했고 그를 움직인 싸늘한 이성은 한 마디로 파괴적이었다. 기요틴을 면하고 유형에 처해진 그는 자신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점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사건 20년 뒤에 그는 “나는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다시 한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것이라”라고 말했다.

 

1892년 테오둘 무니에의 폭탄 테러를 보도한 프랑스 언론 'Le Progrès Illustré'. 사진=프랑스 위키피디아
1892년 테오둘 무니에의 폭탄 테러를 보도한 프랑스 언론 'Le Progrès Illustré'. 출처=프랑스 위키피디아

 

라바숄이 처형된 뒤 몇 달 동안 테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후 1892년 11월, 오페라가의 탄광회사 사무실에서 폭탄이 터졌다. 이어 경찰서가 폭파되면서 경찰관 4명이 죽었다. 1893년 11월에는 정직하고 진실하며 열정적인 노동자인 레오디에(Léauthier)가 세르비아의 장관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4주 뒤 오귀스트 바이양(August Vaillant, 1861~1894)이 라바숄의 복수를 위해 하원에 폭탄을 던지고 이듬해 처형되었는데 단두대에 서서 “부르주아 사회는 사라져라, 아나키여, 살아나라!”라고 외쳤다.

바이양은 무니에나 레오디에와 달리 자유분방한 호인형으로 가난 속에서 자라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가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다. 생애 마지막에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토지에 대한 권리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하여 1892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파리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해 “권리를 요구하여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든 계급의 부르짖음”과 같은 상징적 행위를 하려고 결심했다. 그의 폭탄 투척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음에도 사형에 처해진 것은 적어도 19세기에는 그가 처음이었다.

 

아나키즘을 궁지로 몰아 넣은 에밀 앙리

 

바이양이 처형되고 1주일 뒤 다시 바이양의 복수를 위해 에밀 앙리(Émile Henry, 1872~1894)가 생자르역 부근의 카페에 폭탄을 던졌다. 20명이 부상하고 1명이 죽었다. 저명한 코뮌 투사의 아들인 앙리는 높은 지성과 뛰어난 문장력의 소유자로서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했으나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다. 법정에서 그는 “부르주아는 아나키의 장애물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듬해 교수형을 당하면서 “동지들이여, 용기를 내라, 살아나라, 아나키여!”라고 외쳤다.

앙리의 폭탄 투척으로 아나키즘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당시 옥타브 미르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집으로 돌아가 자기 전에 한 잔의 맥주를 마시려고 카페에 온 이름도 모르는 평화로운 사람들 한복판에 설명할 수 없는 폭탄을 에밀 앙리가 던졌을 때, 아나키에 대한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해도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밀 앙리는 자기가 아나키스트라고 말하고 단언하고 주장도 한다. 그것은 가능하다. 이제는 범죄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행동이 성공하면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다. 모든 도당에는 아나키스트를 자칭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모든 도당은 아니키스트 범죄자와 어리석은 자를 안고 있는 셈이다.”

 

에밀 앙리(Émile Henry, 1872~1894)
에밀 앙리(Émile Henry, 1872~1894)

 

1894년에는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산토 제로니모 카세리오(Santo Jeronimo Caserio, 1873~1894)가 바이양의 사면을 거부한 공화국 대통령을 칼로 자해하고 “혁명 만세, 아나키 만세!”라고 부르짖었다. 카세리오는 롬바르디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 때 밀라노에서 제빵을 배우면서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했다. 1892년에 아나키스트 전단지를 뿌린 혐의로 8개월 징역형을 산 그는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통치자가 소총, 족쇄 및 감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나키스트로 우리의 삶을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칙을 고수해야 합니까? 아니요, 반대로 통치자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다이너마이트, 펌프, 스틸레토, 단검이 될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부르주아지와 정부를 파괴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부르주아 기업의 대표자 인 당신이 내 머리를 원한다면 가져갈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자비도 구하지 않고 처형되었다.

 

사상의 자유 탄압하는 과잉입법으로 이어지다

 

이러한 테러행위에 대응하여 ‘모든 아나키적 선전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두 개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범죄행위의 선동만이 아니라 변명까지도 처벌하는 제1 법은 바이양 테러가 발생하고 이틀 뒤에 제정된 것으로 이미 일어난 범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생길 범죄에 대한 간접적 대응이었다. 그리고 제2 법은 범죄 조직의 단순 모의까지 처벌하여 아나키스트 조직을 분쇄하려는 것이었다. 좌우파 모두 그 특별법에 반대했지만 다수결로 채택되었고 그 뒤 수많은 가택수사와 검거가 이루어졌다. 이 법에 의해 카세리오는 처형되었다. 그 뒤 제정된 제3의 법은 “어떤 수단으로서도” 아나키스트의 선전행동을 금지했다.

이러한 법률들은 엄격한 적용에 의해 아나키즘 운동을 궤멸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최초의 목표는 출판물의 금지였다. 이어 많은 아나키스트 지식인들이 체포되었다. 30명의 아나키스트들이 범죄단체 결성 혐의로 소환되었다. 그 중 도망간 4명을 뺀 26명이 출석했으나 전혀 서로 관련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재판은 진행되어 단체결성이 인정되었다. 26명 중에는 장 그라브와 세바스티앙 포르를 비롯한 당시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 망라되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배심원들에 의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풀려났다. 이는 테러리스트 시대의 마지막을 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래한 반동의 마지막이었다.

라바숄은 그가 처형된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테러리스트 아나키스트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가령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셜록 홈즈 : 그림자게임」에 그에게서 영감을 받은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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