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09-24 17:29 (금)
시(詩)의 쓸모
시(詩)의 쓸모
  •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 승인 2021.06.17 16: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學而思_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대학에서 인문학 연구자들이 늘 맞닥뜨리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유용함’의 문제다. 현실에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 영문학 중에서도 현대 미국시를 전공한 필자도 그 질문을 자주 받는다. 예전에는 “시는 다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현실 너머 새로운 길을 상상하고 꿈꾸고 그 꿈을 향해 걷게 한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답을 조금 달리 한다. “쓸모가 많지요, 시를 제대로 읽으면 언어의 풍부한 결이 보이고, 숨기고 싶은 마음이 보이고, 예리한 사유가 보이고, 역사 속에 보이지 않게 살다간 이들이 보이는데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켜켜이 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도움 되는 일이예요!”

좀 뻔뻔할 수도 있는 말이건만, 필자는 이 말을 실제로 믿으며 공부 길을 걷는다. 시는 언어를 통해 나와 세계, 역사, 타인, 무엇보다 나와 나 자신 사이에 놓인 깊은 어둠을 지나게 한다. 작년에 번역한 앤 섹스턴의 시집 『밤엔 더 용감하지』를 읽고 강원도에 사는 50대 독자가 너무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달콤한 위무의 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싸워 나가는 힘을 얻었다고, 시인의 고투가 온전히 나의 것으로 이입되면서 나도 용감해지겠노라 다짐한다고. 심보선, 이성복, 강은교 시인 등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도 고되지만 보람 있었다. 언제 어디서 읽었는지, 낯선 독자가 ‘아, 한국에 이런 시인이 있네요’ 말을 건네면서 불통의 벽이 살짝 낮아지는 경험을 했다.

시는 무위의 언어지만,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얻어지는 느낌과 사유다. 번역은 불가능을 더듬어 가능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시를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은 고적한 일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 가려진 역사의 틈새를 꼼꼼하게 살펴야 하는 고단한 일이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번역하면서 1930년대 미국의 거리와 건축공법을 그려보고,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를 번역하면서 19세기를 살다 간 여성의 마음에 어떤 불이 타고 있었는지 실감한다. 3세대 한국계 미국인 캐시 송의 시를 번역하면서 첫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건너간 이민자들의 생활을 생생히 본다. 지금은 지난 해 여성 시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탄 루이즈 글릭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데, 온갖 꽃들의 목소리로 창조주와 대화하는 시인의 언어를 응시하면서 세계의 폐허 속에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한 인간이 안간힘으로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이번 학기 코로나19로 갇혀 지내는 우울한 젊음들과 월트 휘트먼을 읽었다. “지금이 있다는 것보다 더 나은 젊음도 늙음도, 더 나은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을 곱씹으며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은 매일 매순간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과거의 실패를 되씹지 말고 밖으로 나가 더 걸으라고. 시의 언어가 그리는 구체성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들고 나의 언어와 세계의 한계를 직면하게도, 또 그를 넘어서는 사유를 가능하게도 한다. 만족보다는 부족함을 늘 느끼고, 여유보다는 시간과의 싸움을 되풀이 하는 번역∙연구∙교수자의 삶이 늘 빠듯하지만, 그래도 시의 길을 걸으며 걸어온 긴 시간이 행복하다 싶다.

그 길에서 “나는 말을 해요, 산산이 부서졌기에”(루이즈 글릭)라는 말, 혹은 시인은 판단하는 자인데 “판사가 재판하듯 판단하지 않고 태양빛이 무력한 것들 주변을 비추듯이 판단하는 자”(휘트먼)와 같은 말은 의지처가 된다. 그러고 보니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고 다른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이”라고 하신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 말씀에서 나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연구자의 길을 숙명처럼 걷는 분들, 그 고적한 길을 생각하며, 오늘도 부서진 말의 파편을 잇다가 이 글을 쓴다. “이 시간의 빛을 보라(Look at the light of this hour, 로버트 크릴리).”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것과 시가 그 말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믿음의 실천을 궁구하는 공부 길을 걷는 중이다. 앤 섹스턴 시집 『밤엔 더 용감하지』(2020), 어맨다 고먼 『우리가 오르는 언덕』(2021)을 번역하고 산문집 『바람이 부는 시간』(2019)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