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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학계 결산_ 고구려·고종 등 역사학 활발…학문의 주체성 모색
2004년 학계 결산_ 고구려·고종 등 역사학 활발…학문의 주체성 모색
  • 최철규 기자
  • 승인 2004.1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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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에 역사학계와 진보학계의 거목인 고병익·이기백 교수와 김진균 교수가 타계하면서 학계의 상실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 17대 총선, 헌법재판소 등의 굵직한 사회적 이슈들이 불거져 나오면서 관련 분야의 담론 논쟁이 뜨거웠는데, 산발적인 담론 생산구조의 언저리만 머물 뿐, 지속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역사학계는 기초학문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고대와 근대시기에 담론 지형의 선을 명백히 긋고 기초 자료를 풍부히 축적하는 성과를 올렸다. 과학계는 ‘황우석 신드롬’이 연중 강한 파급력을 보인 가운데, 비인기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 성과가 발표됐다. 특히 하반기에 과학기술지원을 위한 체제정비가 급물살을 타면서 향후 새로운 제도 윤곽에 과학기술인의 관심이 몰리고 있다.<편집자 주>

 

◆ 황우석 신드롬…과학관련 부처 개편 화제

올해는 ‘미개척지’에 대한 과학의 원초적 호기심이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표출된 해였다. BT분야의 아방가르드격인 뇌과학은 다양한 뇌과학 대중서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뇌과학기술연구소’와 가천의대의 ‘뇌과학연구소’ 설립을 통해 안정적인 근거지를 확보하고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섰다. 그간 비인기 종목이었던 우주연구도 스타급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연세대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이 안드로메다은하의 초 광시야 자외선 관측에 성공해 국제천문학계의 최대 현안인 은하의 형성과 진화연구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는데, 현재 후속 연구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과학계 ‘최고’의 수식어를 모두 가져 간 황우석 교수는 국내외적으로 확실한 이슈메이커 역할을했다.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복제실험에 성공한 황 교수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유엔의 인간복제금지협약을 유보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배아복제의 윤리적 문제를 둘러싼 생명공학계와 윤리학계의 시각차는 좀처럼 좁혀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1월에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에 따라 정부의 졸속 법안 처리 문제도 논쟁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한편, 황 교수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관심과 지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과학기술부는 2005년도 과학기술진흥기금 예산에 황 교수에대한 2백65억원의 돈을 지원했다.

이공계 위기론과 기초과학 붕괴 우려에 해방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과학기술관리 부처의 개편은 많은 과학기술인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지난 10월, 정부는 과학기술 관련 사업을 총괄 조정하고, 국가 R&D 예산을 효율적으로 조정·배분하기 위해 과학기술부 장관을 부총리로 승격시키고 과학기술혁신본부를 신설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추진된 체제 개편은 정작 과학기술인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사전 의견수렴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기구의 성격과 인력구성을 결정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일부 기초과학연구사업의 교육부 이관에 대한 비판은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학진의 구체적 지원체계 조정은 내년도에나 확인할 수 있게 됐다.

◆ 고구려사 화두…근대 기초개념 연구 활발

역사학계는 고대와 근대라는 배의 선후미가 번갈아 들렸다 놓였다하면서 격랑의 바다를 헤쳐 나갔다. 중세는 태풍의 눈처럼 잠잠했다. ‘고구려사’ 문제는 중국의 정치적 왜곡에 대한 성토담론이 이어진 후, 진정국면을 보이며 한중간 공동학술심포지엄을 통한 학술적 해결의 기반을 마련해나갔다. 이 과정에 자국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고대사학계의 민족주의 사관과 역사에서 국경을 없애자는 탈민족주의 사관이 전선을 형성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한제국기’의 재정과 국제의 성격을 둘러싼 고종시대 논쟁이 길게 이어졌는데, 경제사학계와 국사학계의 몇몇 층위들이 부딪히면서 연구가 미흡한 개항기의 역사상을 풍부하게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근대사’의 쟁점을 형성했고, 학제적 관심과 융합을 불러 일으켰다.

철학계는 데리다의 죽음이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90년대 이후 철학계의 발전기였던 유성의 소멸의 자취는 잠깐 빛났지만, 이 땅에 뚜렷한 운석의 흔적은 남기지 못했다. 데리다 죽음은 그저 ‘연기’됐다. 서양철학계가 어떤 내부변화의 움직임 없이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등을 비롯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번역 작업에 충실한 반면, 동양철학계에서는 동서비교철학의 선두주자인 김형효 교수를 비롯해 장자, 노자를 새롭게 주목하는 소장학자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또한 퇴계-율곡의 대립구도로 짜여진 조선시대 사상사의 계보학이 내부적으로는 ‘리기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 외부적으로는 정도전과 동학에 대한 도올 김용옥의 해석에 부딪히면서 잠시간 지진이 일어났다가 휴식중이다.

문학계는 문학의 역할, 문학사 해석에 있어서 집단보다는 개인이, 엘리트보다는 대중에 초점이 맞춰진 논의들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침체와 암중모색의 연장선에서 관찰된다. 김재용 원광대 교수의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소명출판 刊)가 균형있는 문학사 서술로 ‘친일청산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을 받았고, 황종연 동국대 교수의 ‘고은 비판’과 이에 대해 간략한 토론이 있었지만, 기존의 민중·민족주의 對 개인주의라는 완강한 구도를 벗어난 본격적인 논의의 장을 만들지는 못했다.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을 통해 그간 미진하게 축적된 인문학 연구들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주자대전’, ‘자치통감’ 등 국학고전의 번역 작업이 서서히 가시권에 들어섰으며, 근현대 생활상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수집이 이뤄져 ‘근대성’이라는 주어진 프리즘을 통해 근현대사를 연역해내는 작업에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잡지 및 의복 등 일상적 소품들을 통해 근대 여성이 위치한 시공간적 개념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두드러졌다. 실증성의 범위가 확장되고 개념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이 지속된다면, 과거에 대한 새로운 역사상의 형성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경제해법 둘러싼 논란…주체적 학문 모색

헌법학계는 분주하고도 착잡한 한해를 보냈다. 대통령 탄핵안과 신행정수도 특별법의 헌재 판결을 거치면서 ‘헌법’이 단순히 ‘헌 법’이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을 확보하는 소득을 건졌다. 그러나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소모적 법리논쟁만 과잉생산됐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언론매체와 학술대회에서도 헌재 해체론부터 제왕적 대통령과 당파적 정치인들에 대한 규탄을 통해 헌재를 옹호하는 극단적인 논쟁만 넘쳐났을 뿐, 구체적이며 합리적인 제도 개선에 대한 혜안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황해문화’ 겨울호는 “아주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헌법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부터 재정립할 것을 제안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로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적 선택에 골몰해 있던 경제학계에는 모처럼 새로운 지적 자극이 유입됐다. 민족자본주의를 앞세운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 ‘개혁의 덫’(이상 부키 刊) 등의 도발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간하면서, 재벌에 대한 인민재판식 구조개혁을 비판하고 국가의 책임·역할 강화론을 제기했다. 장 교수의 주장은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주주자본주의를 요구하던 장하성, 김상조 교수와 공기업민영화, 금융시장 개방, 재벌구조개혁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맞붙었다. 이들의 논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암묵적으로 전제한 채 ‘경기전망’에만 쏠려 있는 학계의 동향에 경종을 울렸다.

정치학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추상적 합의의 이면에서, ‘시민’, ‘민중’, ‘다중’ 등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반복되면서, 촛불로 추모된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새로운 요람으로 탈바꿈시키지는 못했다. 매년 80만명씩 증가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노사정간 상이한 시각차만을 확인하는 가운데 메가톤급 폭탄으로 커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대비평’ 여름호가 ‘평생구직’시대에서 노동담론의 조건과 방향을 탐색하는 특집을 제시했지만, 후속논의를 이끌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장기화된 영·미-이라크 전쟁은 중동이슬람연구가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펼 수 있는 토대가 됐다. 하지만 미국의 세계전략을 비판하는 많은 외국번역물들의 홍수와 북핵문제에 집중된 담론의 북새통은 비생산적이었다.

사회과학내 학문의 주체화를 모색하는 메타학문적 논의들이 지난해에 이어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며 본격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3월에 강정인 서강대 교수가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아카넷 刊)를 통해 서구중심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 틀을 제시했으며, 하반기에 공동연구와 논의들이 집중적으로 분출됐다. ‘창작과 비평’ 겨울호는 ‘학문의 주체성과 오늘의 대학’이라는 특별 기획을 통해 왜곡된 대학·학문평가 체제와 학문의 서구 종속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연계시켜 논의했다. 학술단체협의회는 지난 해 ‘우리 학문속의 미국’ 심포지엄에 이어 민주사회정책연구원과 협동으로 학문 주체화 전략을 구사한 해외 사례를 점검하고, 주체적 개념화를 위한 국내의 시론적 연구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이론 구축을 위한 개념 개발에 주안점을 뒀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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