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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가 덮친 ‘학문의 자유’ 논쟁
미국 대학가 덮친 ‘학문의 자유’ 논쟁
  • 박강수
  • 승인 2021.06.15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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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좌파에 정복당한 캠퍼스 vs 늘어난 소수자를 위해 마땅히 성찰해야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지난해 12월 일리노이대시카고의 법학과 교수 제이슨 킬본은 자신이 낸 시험 문제로 인해 학교의 조사를 받게 됐다. 그의 민사소송법Ⅱ 수업 기말고사 지문에 혐오표현이 들어갔다는 혐의다. 해당 지문은 인종과 성별에 근거한 가상의 고용 차별 시나리오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구체적인 일화가 묘사되면서 각각 흑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비속어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실렸다. “n____”, “b____”.

단어가 검열돼 실렸음에도 시험지를 마주한 학생들은 학교 측에 문제 제기를 했고 킬본 교수는 조사 대상이 됐다. 얼마 뒤인 올 1월 19일, 대학 내 표현의 자유를 위해 활동해 온 비영리단체 FIRE(개인의 교육권을 위한 재단)는 “킬본이 낸 문제는 학문의 자유와 수정헌법 1조(종교와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 받아야 한다. 대학은 킬본 교수를 조사하거나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공식 입장문을 전달했다.

킬본 교수 사건은 미국에서 대학 내 자유를 둘러싼 오래된 교전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FIRE의 대표를 맡고 있는 그렉 루키아노프는 지난달 27일 미국의 고등교육전문지 <더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이하 크로니클)> 기사를 통해 “오늘날 학문의 자유는 최악의 수준이다. 아마도 ‘적색 공포(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20세기 초중반 미국의 반공주의 광풍)’ 이후 가장 심각할 것”이라고 평했다. 학문의 자유가 벼랑 끝으로 몰렸다는 주장이다. 실제 FIRE는 자체 조사를 통해 학생과 교수들 중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고 느낀 경우가 2018년 652건, 2019년 731건, 지난해 1천1건으로 꾸준히 늘어 왔다고 밝혔다.

 

“대학은 소셜 전사들의 일당 국가”

 

루키아노프 대표는 특히 학생들의 변화에 주목한다. 2015년에는 <디 아틀랜틱>을 통해 “정서적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생들은 점점 더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언어, 생각들로부터 보호받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정신 건강과 교육에 비참한 일”이라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불편한 의견과 표현들을 격리시키려고만 드는 행태는 사람들을 편협하고 연약하게 만들고, 이는 무엇보다 학생 자신에게 해롭다는 지적이다.

학생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좌파 세력에 대한 비판과 겹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성토다. <크로니클>은 “대학 캠퍼스는 그들이 받아들인 진리에 대해 감히 반문하는 이는 누구든지 몰려가 덮치고 조리돌리고 험담하고 추방시키는 ‘소셜 저스티스 워리어(Social Justice Warrior)’들의 일당 국가가 됐다”(에이미 왁스 펜실베니아대 법과 교수), “좌파 일색인 캠퍼스에는 더 이상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다”(헤더 맥도날드, 에세이스트), “오늘날 학문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은 극좌에서 온다”(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등 목소리를 전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문화전쟁의 결과, 대학이 리버럴 세력과 좌파 집단에 점령당해 버렸다고 이들은 개탄한다.

 

“늘어난 소수자들을 위한 자기점검은 당연한 것”

 

반론도 있다. 역사학자 겸 웨슬레얀대 총장인 마이클 로스는 “내가 학생∙교수였던 시절보다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의 범위는 훨씬 넓어졌다”며 학문의 자유가 “실존적 위기”에 처해있지는 않다고 본다. 그는 “’깨어있는(woke)’ 캠퍼스 문화는 학생들 중 여성과 소수자가 늘어났다는 사실의 반영”이라고 설명한다. 학생들의 인구 구성이 바뀌었다면, 교수가 이를 인지하고 자신의 언어와 행동을 검열하는 일은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 미국대학교수연합(AAUP) 대표를 맡고 있는 한스-호에르 티에데는 “좌익 편향은 과장”이라면서 “점점 더 미국의 우파는 반-고등교육, 반-과학, 반-증거, 반-진실 세력이 되고 있다. 고등교육, 과학, 증거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우파에서 멀어지는 일은 놀랍지도 않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우스캐롤라이나대 풀리어스 고등교육센터 명예교수인 윌리엄 티어니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학생들이 ‘선동가’(provocateur)를 교내에 불러들여 막대한 보안 비용을 초래하고 학교 예산을 깎아먹으려 한다면, 안 된다고 하라”고 조언한다. “학술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교육기관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거절해도 좋다는 것이다.

 

나아가 <크로니클>은 “학문의 자유가 축소되는 현상은 억압의 결과라기 보다는 안정적인 학자 일자리가 감소되는 데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 진짜 원인은 정치적 대립이 아니라 경제적 기반이 불안정해진 데 있다는 것이다. 기사는 교수의 ‘테뉴어(종신 재직권)’를 줄이고 학과를 통폐합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고 지적하며 티어니 명예교수의 말을 전한다. 그는 이러한 전반적인 감퇴 현상이 “공공성을 담당하는 기관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 절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며 주정부가 아닌 연방 정부가 나서 안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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