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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衆像의 탈물신화 필요…자유주의로 90년대 문학 조명 못해
民衆像의 탈물신화 필요…자유주의로 90년대 문학 조명 못해
  • 황종연 동국대
  • 승인 2004.12.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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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 하정일 교수의 비판(교수신문 제339호)에 답하여

황종연 / 동국대 국문학

나의 글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고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 비판'에 대한 하정일 교수의 반론은 하 교수에게 동시대 문학의 고민을 공유할 의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나는 문제의 글에서 민주화 이후 정치와 사회에 대한 나 자신과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관찰에 근거하여 다원적 민주주의의 정립을 위한 지성적, 문화적 기반 강화라는 과제를 제기했고, 민주주의 교육에서 민중-민족문학이 담당한 중요한 역할을 상기시키면서 '만인보' 논의에 임했으며, 논의의 대부분을 '만인보' 분석과 비판에 바친 다음 “민중의 복합적 구성”이라는 동시대 사회 현실에 합당한 정치와 문학의 만남을 향후의 문학에 주문했다. 나의 ?만인보?론의 핵심은 다원적 민주주의에 걸맞은 새로운 민중 이해를 위한 그 80년대적 민중상의 脫物神化이다. 그런데 하 교수는 나의 다원주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그 주장의 근거인 동시대 한국사회에 대한 나의 이해를 문제삼지 않았으며, 특히 나의 민중-민족주의 비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 비판의 주요 내용을 이룬 나의 '만인보' 해석에 대해 어떤 검토도 하지 않았다. 하 교수의 반론은 동시대의 한국 사회와 문학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일반론에 불과하다. 하 교수의 반론을 읽는 동안 하 교수가 나의 주장과 대결하고 있다기보다 스스로 지어낸 관념과 싸우고 있다는 인상마저 받았다.

하 교수는 80년대의 민족-민중 담론 비판을 위해 '만인보'를 택한 것이 적절한 일인지 의문이라고 하면서 '만인보'를 “당대 최고의 성취라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엇이 당대 최고의 작품인가는 그 자체가 논의를 요하는 문제이지 특정 작품 비판을 퇴치하기에 충분할 만큼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만인보'가 당대 최고의 작품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를 제시했어야 한다. '만인보'는 하 교수 말대로 당대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 몰라도 민중-민족주의를 논하기에 적당한 작품의 하나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그만큼 장구한 시대와 그만큼 폭넓은 계층에 걸쳐 민족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집은 없다. '만인보'에 찬사를 바친 문학인 중에 백낙청, 황석영 같은 민중-민족문학의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그 시집이 창작과비평사 만해문학상과 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상을 1988년과 1991년에 각각 받았으며 올해에도 신채호의 유업을 기려 제정된 단재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더욱이 고은만큼 엄연하게 민중-민족문학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는 문학인도 드물다. 최근 노벨문학상의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한국 주요 언론이 다투어 주목하는 인물이 바로 고은 아닌가? 하 교수 스스로도 “'만인보'가 1980년대 민중적 민족주의의 공과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만인보'를 택한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 교수가 제기한 비판의 요점은 나의 글이 “자유주의 일변도의 위험한 시각을 담고” 있다는 점인 듯하다. 내가 자유주의를 민주주의의 원천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과거 한국의 보수 세력과 민주 세력 양쪽 모두에 의해 손실된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의 심화가 한국 민주주의의 강화에 핵심적이라고 믿고 있으며 근대적 자유 관념의 부재가 '만인보'의 민중-민족주의의 중대한 결함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하 교수가 의심하듯이 자본주의 시장의 이데올로기 따위를 추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글에서 자유주의가 거론되는 맥락을 조금 유심히 살폈더라면, 최소한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의 민주주의 혁명론과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무프(Chantal Mouffe)의 급진 민주주의론이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했더라면 그렇게 판에 박힌 의심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자유주의 지지는 “개인이 그 자신을 정의하고 발전시킬 권리”라는 그 정치사상의 기본에 대해 동의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나는 하 교수가 “사적 개인”이라는 괴상한 조어로 지칭한 자유주의상의 개인, 즉 자신이 단독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믿고 단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뿐인 개인이라는 관념을 변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개인들은 집합적 정체성들이 서로 얽히는 지점에 그 자아정체성의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정체성의 정치와 문화에 대한 탐구”가 문학이 민주주의에 관여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하 교수가 고맙게도 동의를 표해준 나의 주장---문학인들이 “자아정체성의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연관들을 헤아리고 집합적 정체성들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윤리와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이 놓여 있는 맥락이 그것이다.

하 교수가 자유주의 비판이라는 형태로 반론을 펼친 데는 내가 고은의 민중상에 내재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검토에 치중한 나머지 자유주의의 경계할 만한 형태 즉, 자유 개인주의에 대한 내 나름의 반대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 교수의 자유주의 비판은 나의 글과의 관련을 떠난 일반론의 차원에서도 찬동하기 어렵다. 그 비판의 요지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자유 민주주의가 “본원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거기에 전제되어 있는 자유주의 이해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고루함을 면치 못했다. 철학적으로 진전된 정치이론에서는 정치상의 자유주의와 경제상의 자유주의를 혼동하지 않는다. 하 교수가 존 롤스(John Rawls)를 이해하고 언급했다면 그가 사유 재산을 자유주의의 본질적 부분이 아니라 우연적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자유주의의 특징을 새롭게 확정했다는 것쯤은 모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이후 새로운 민주주의 모색의 주요 방향을 이루기도 했다. 라클라우와 무프만 해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진보적 요소를 절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하 교수는 나의 비판으로부터 민중-민족문학을 구하려고 시도하는 중에 적지 않은 오독을 범하고 있다. 그 예의 하나가 민중은 “공백의 기표”라는 나의 설명을 “민중 개념의 본원적 한계”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인 대목이다. 민중이 공백의 기표라는 것은 민중이 원천적으로 개념 확정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어떤 민중 개념도 영구적인 권위를 누리지 못하고 헤게모니 투쟁에 따라 존폐와 변환의 운명을 겪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민중-민족문학이 형상화한, 시대적으로 특수한 민중의 퇴락을 말하고 있지, 일반적 의미에서의 민중의 한계를 말하고 있지 않다. 민중이라는 기표를 버리면 민주주의 담론 정치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나의 ?만인보? 비판은 계급이나 민족 같은 특정 실재에 의해 점유되지 않는 민중 개념을 제안하고 있으며 그것을 집합적 정체성의 복합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하 교수의 민중-민족론은 누구도 설득하기 힘든 궤변을 포함하고 있다. 계급, 민중, 민족 등이 “근대적 개인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그 결사체(結社體, association)는 개인들이 어떤 이익을 위해 자유 의지로 연합하여 만든 조직을 지칭하는 것이다. 계급, 민중, 민족처럼 개인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속하게 되는, 그들의 삶에 선행하여 존재하며 그들의 삶을 일정하게 규정하는 집합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민중, 민족을 “개인들의 자발적 결사체”라고 하면 성별, 가족, 인종 역시 개인들의 자발적 조직이 되는 셈이다.

하 교수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나 내가 민주화 이후 정치와 문학에 대한 사유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실체적 통일성의 부재, 달리 말해 갈등, 분열, 적대의 상존(常存)이 민주사회에서는 당연한 이치임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만인보' 비판에서 인용한 클로드 르포르의 생각을 다시 빌리면, 민주주의 혁명은 군주가 상징하는 유기체적 전체성이 사멸한 사회, 그 구조를 결정할 궁극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성립시켰다. 민주사회에서는 권력, 법률, 지식이 근본적으로 비결정성을 띠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민주사회는 통제불능의 모험이 벌어지는 극장과 같다.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민중의 이름으로 사회를 평정하고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삶의 조건임을 수락하는 것이다. 하 교수는 “민주주의의 내용성을 확보”해야 한다거나 “다원주의에 대한 구체적 상”이 필요하다는 말로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것은 특정한 민주정치 프로그램 제안이 문학비평가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80년대 “사회과학 세대”를 성립시킨, 저 확실성에 대한 순진하고 위험한 믿음을 상기시키는 발언이라는 이유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90년대는 황 교수의 진단처럼 민중-민족문학이 퇴조하고 자유주의문학이 활황을 누린 시대였다”고 하 교수는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고은 비판에서는 물론 다른 어떤 글에서도 90년대 문학을 “자유주의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단한 적이 없다. 90년대 문학은 오히려 민중-민족문학/자유주의문학의 대립이 무너진 시대다. 민중-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상대적 시세에 따라 90년대 문학을 판정하는 것은 90년대 문학의 변별성 바로 그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신경숙의 '외딴 방'을 비롯한 90년대의 주요 작품이 여성 문학인들의 자기표현으로부터, 페미니즘 미학과 정치학 언저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차 둔감한 소치다. 7, 80년대 민중-민족문학의 유산을 엄정하게 평가함으로써 미래의 한국문학에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민중-민족문학이 그 민중생활과 경험에 집중한 가운데 보여준, 한국인의 새로운 “공동 감각(common sense)"을 창조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교훈적이다. 나는 민중-민족문학을 옹호하려는 하 교수의 열성을 존중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민중-민족주의/자유주의 대립 같은, 문학 자체의 진전에 의해 폐기된 개념을 고수하는 식으로는 민중-민족문학을 살아 있는 전통으로 만들지 못한다. 동시대 문학과 사회의 현실에서 유리된 발상과 신념으로 민중-민족문학의 업적을 강변하는 것은 오히려 자라나는 문학과 비평의 재능들로부터 그것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 우려가 있다.

필자는 동국대에서 ‘한국문학의 근대와 반근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이라는 譯語’, ‘하나의 국문학을 넘어서’, ‘낭만적 주체성의 소설’ 등의 논문이 있고, ‘비루한 것의 카니발’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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