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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사적 대전환기, ‘문명의 저울’로서의 대학을 사유하자
문명사적 대전환기, ‘문명의 저울’로서의 대학을 사유하자
  • 이재영
  • 승인 2021.06.08 0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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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내일을 말한다 ⑤ '스마트 휴먼그리드 플랫폼' 대학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제안
"생태·재난·디지털에 민첩하고 유연한 대학으로"

“생태, 재난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인문에 능률적이고 선제적으로 대처해가려면 
대학은 적어도 공간, 인적 구성, 조직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인문을 민첩하고도 유연하게 품어내야 한다.”

이재영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문명의 저울'로서의 대학을 "생태·재난·디지털에 민첩하고 유연한 대학"으로 설명한다. 

대학은 무엇보다도 인문을 견인하고 선도해야 한다.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말함이 아니다. ‘인간다움의 무늬[人紋]’, 곧 인간이 인간으로서 펼쳐내는 모든 문명 행위를 대학은 자신의 동력이자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문명사적 대전환이 이뤄지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문명의 저울[文衡]’이라는 대학의 본령을 한층 능동적으로 발휘해야 한다. 

대학이 마주하고 있는 인문

우리는 재난이 상수가 되고 디지털 문명이 인류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문명사적 대전환 시기를 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인구절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적, 사회적 재난은 개인부터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생태파괴, 이상기후 등으로 인한 재난은 일국 차원을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ESG’, 곧 ‘친환경(Environment)’, ‘사회적 책임(Social)’, ‘윤리적 지배구조(Governance)’라는 가치가 전 사회적으로, 또 국제적 차원에서 주요 화두가 되는 까닭이다. 개인부터 한 국가, 권역, 세계 차원에 걸쳐 일어나는 자연적, 사회적 재난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실현해야 할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지 당위 차원에서 그래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식기반사회가 구현되어 지식이 고정자산이 된 것처럼 친환경도 자산이 되고 있고 이윤을 내고 있다. 탄소 배출권이 거래되고, 바이든 미 대통령 취임 후 친환경이 미국의 이익 실현에 주요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마디로 친환경은 돈이 되고 힘이 되고 있다. 생태라는 화두를 윤리와 이윤 모두의 차원에서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 많은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경고하는 팬데믹의 빈발 가능성,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의 일상화 등도 주시해야 한다. 이 모두가 다름 아닌 인간의 행위로 인해 야기된 현상이라는 점에서 대학이 직시해야 할 인문이다.

인구절벽, 지방 붕괴 등으로 인한 불안 증폭 같은 사회적 재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지 사회문제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당장 대학 소멸, 지방 붕괴를 야기하고 있는 인구절벽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국가 소멸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초고령사회와 맞물리면서 국민의 지속가능한 노년이 휘발될 수도 있다. 남북분단, 한반도 주변 국가의 군비 증강 등도 무시해선 안 될 사회적 재난이다. 불안과 공포가 일상화되면 재난을 재난으로 여기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 사회적 재난은 그 위험성이 더욱 크다. 대학이라도 평소에 착실히 대처해가야 하는 인문이며, 무엇보다도 대학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윤리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결코 경시해선 안 되는 인문이다.

한편 디지털 과학기술의 시대가 본격 전개되고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의 진전이 개개인의 삶부터 사회와 국가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AI)은 인간을 노력과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인간 자체를 대체해가고 있다. ‘디지털 문해력’은 대학은 물론 사회의 기초교양으로 운위되고 있고, 디지털 기반 정보통신기술의 높은 문제해결 역량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입증되었다. LG와 네이버 등은 자연어를 구사하는 GPT-3를 능가하는 AI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고, 인터넷을 능가하리라고 예견되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약진에서 보이듯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경계는 성큼성큼 사라지고 있다. 이 또한 대학이 마주하고 있는 인문이다.
  
대학의 미래지향적 재구성

생태, 재난 그리고 디지털이라는 인문에 능률적이고 선제적으로 대처해가려면 대학은 적어도 공간, 인적 구성, 조직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인문을 민첩하고도 유연하게 품어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은 새로운 공간을 품어야 한다. 온라인에서는 메타버스의 대학판인 ‘메타유니버스(Meta-Universe)’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교육은 물론 대학의 일상이 온라인 기반으로 너끈히 이뤄질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기성세대의 감각과 사유의 기반이 대면세계[physical world]라면, 이른바 ‘MZ세대’의 그것은 비대면세계[virtual world]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디지털 환경에 대한 감각이 기성세대와 사뭇 다르다. 이는 온라인 기반 교육의 문제점으로 대두된 사회적 역량의 계발 같은 과업 또한 온라인 기반으로 도모해야 함을 말해준다. 또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통합된 공간을 대학의 새로운 공간으로 품어야 함도 일러준다.

‘대학-간(間)’, ‘유니버-시티(Univer-City)’ 등도 대학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하는 공간이다. 대학이 마주한 생태, 재난, 디지털이라는 인문에 대응해가는 일은 어느 특정 대학이 혼자 감당하기는 어렵다. 모든 대학이 ‘그리드(grid, 연결망)’를 구축하여 집단지성을 형성해야 한다. 대학별로 할 수 있는 부문에 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대학들이 연대해서 유관 경험을 공유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인간을 위한 그리드, 즉 ‘휴먼그리드’를 구축하고, 예컨대 ‘미래공유연구원’ 같은 대학 간 공동기구를 설립하여 인간 삶의 고양을 위한 역량 개발과 삶터의 미래지향적 설계 등을 체계적으로 수행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과 지역의 협업이 명실상부하게 실현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지역대학의 붕괴, 지방 소멸과 같은 현안 해결을 넘어 21세기 평생공부시대의 스마트 플랫폼으로서의 대학 역할을 지속해갈 수 있게 된다.

‘대학인’도 재구성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는 중장기적으론 고등 연구 인력의 부족으로 이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는 우수한 인력이 대학 바깥을 선택한 지도 오래되었다. ‘문명의 저울’ 역할을 한층 기민하게 수행해야 할 대학의 역량이 갈수록 약화된다는 얘기다. 젊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초래할 대학의 미래다. 하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층 자유로워진 범지구적 인재이동(talent mobility)을 적극 활용하는 방도가 그것이다. 현대판 ‘빈공과’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대제국을 건설한 당(唐)이 문호를 넓혀 주변국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고자 빈공과를 실시했던 것처럼, 외국의 우수한 인재를 학생뿐 아니라 대학 교수와 연구진으로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채용해야 한다.   

한편 비유컨대 대학의 신체도 새로운 문명조건에 걸맞게 거듭나야 한다. 수형도(樹型圖)처럼 수장을 정점으로 하여 위계적으로 갈래 쳐진 기존의 조직으로는 대학이 마주한 인문에 효율적으로 대응해가기 어렵다. 대학의 신체가 ‘애자일(agile) 조직’으로 변모되고 ‘다극적(multipolar)’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위계적으로 잘 조직되고 각 갈래별 직능 분장이 체계화된 조직은 더는 유능한 조직의 제일 조건이 아니다. 지금은 급변하는 인문에 보조를 맞춰 기민하게 변화하고 잘 적응할 줄 아는 애자일 조직이 곧 유능한 조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탈권위적, 탈경계적, 탈중심적 거버넌스가 요청된다. 수평적이고 협업적이며 문제해결 중심, 성숙성장 중심의 대학 신체가 요청되는 까닭이다.

‘문명의 저울’로서의 대학 

대학은 간단없이 진화해왔다. 12세기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설립된 대학들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고구려의 태학, 고려의 국자감, 조선의 성균관도 오늘날의 고등교육기관과 분명하게 다르다.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이 그때그때의 인문에 맞추어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진화의 매 순간, 대학이 ‘문명의 저울’로서의 역할을 방기한 적도 없었다. 생태, 재난,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인문과 마주하여 필자가 제시한 ‘스마트휴먼그리드 플랫폼으로서의 대학’이라는 제안도 마찬가지다. 문형으로서의 대학이라는 오랜, 그렇지만 늘 새로웠던 지향을 실현하기 위한 미래대학의 새로운 포맷이다. ESG라는 지속가능한 가치의 실현, 메타유니버스 같은 대학의 신공간 창출, 대학인의 다문화적 구성, 그리고 다극적 거버넌스를 구현하는 애자일 조직으로서의 대학의 신체 등은 진화하는 대학이 펼쳐낼 인문의 기초 토대이다. 

대학의 진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대학 안팎을 둘러싼 문명사적 대전환은 진화를 더욱 채근하고 있다. 더는 머뭇거릴 틈이 없다. 대학 스스로가 그러한 진화의 중심으로 당당히 나아갈 때이다.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어바나-샴페인)에서 박사를 했다. 서울대 학생처장과 기초교육원장, 인문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현재 인문학 및 인문정신문화진흥위원회 위원과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 학술발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영어음운론』『영문도 모르고 영어를 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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