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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7] 누벨바그가 칭송한 카메라를 든 랭보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7] 누벨바그가 칭송한 카메라를 든 랭보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6.0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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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비고

의열단을 다룬 영화 「아나키스트」는 2000년에 개봉되었다. 이어 의열단은 「암살」(2015)과 「밀정」(2016)에서 다루어졌고, 의열단 계열과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동주」(2016)와 「박열」(2017)에서 다루어졌다. 의열단이나 박열 부부가 아나키스트인 것은 분명한 반면, 「동주」의 송몽규가 아나키스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21세기에 들어와 아나키스트들이 영화에서 다루어진 것은 아나키스트에 관심을 갖는 나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민족독립운동가와 테러리스트라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영화의 주인공들에게서 아나키즘의 진면목이 오늘의 관중들에게 제대로 이해되는지 의문이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본 한국영화 중에는 「남쪽으로 튀어!」(2013)가 반권력의 아나키즘을 이해하기에 그나마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인 일본소설보다는 못하지만 그밖에 다른 반권력의 아나키즘 영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나키즘 영화에 대한 이론서인 「영화, 아나키스트의 상상력」도 2007년에 번역되었다. 리처드 포턴(Richard Porton)의 원저는 ‘Film and the Anarchist Imagination’인데 번역서는 마치 영화가 아나키스트의 상상력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예술을 아나키즘으로 보는 나로서는 그런 번역이 마음에 들지만, 책의 내용은 수많은 영화 중에서 소수인 아나키즘적 영화를 다루고 있다. 가령 장 뤽 고다르, 리치 보덴, 켄 로치, 장 비고, 프레데릭 와이즈만의 작품들이다. 그 중에서 장 비고(Jean Vigo, 1905~1934)는 최고참이라고 할 수 있다.

 

장 비고(Jean Vigo, 1905~1934)
장 비고(Jean Vigo, 1905~1934)

 

스물 아홉, 세 시간 분량의 필름

 

비고는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독일에 대한 평화주의를 주장하다가 극우조직인 악시옹 프랑세즈에 의 해 1917년 감옥 병원에서 살해된 것으로 의심되는 생디칼리슴 아나키스트 언론인의 아들로 태어나 가명으로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21세에 결핵 요양소에서 만난 폴란드 출생 리두 로진스카(Lydu Lozinska)와 니스로 가서 결혼했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니스의 스튜디오에서 촬영 보조를 하며 빈부격차를 다룬 「니스에 관하여」(1930)와 세계 신기록을 세운 수영선수의 삶을 다룬 「장 타리스, 물의 왕」을 만들었다. 조증에 걸린 태양 숭배자들에 대한 공격적인 다큐멘터리인 전자는 카지노를 오가는 부르주아 관광객들의 나태와 슬럼가에 사는 노동계급 하층민들의 공동체 정신을 병치시키면서 기존체제를 비판하는 비고의 아나키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두 작품이 무성의 기록영화인데 반해 1932년에 이주한 파리에서 만든 「품행제로(Zéro de conduite) 」와 「라탈랑트」는 유성의 극영화였다. 그러나 극영화 둘은 상영금지 처분을 받고 그가 죽고 12년이 지난 1946년에야 상영되었을 뿐 아니라 네 편의 영화 모두 흥행에 실패해 가난하게 살다가 1934년 결핵으로 죽었다. 스물아홉 살이었다.

 

「품행제로(Zéro de conduite) 」(1932)

 

「품행제로」는 비고의 아버지가 생전에 옹호한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교육가 프란시스크 페레르의 교육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점이 영화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비고는 아동의 순수성 따위와 같은 낭만적인 사고와는 무관하게 문제아들을 문제아로 묘사한다. 영화는 여름 방학이 끝나 증기 기관차를 타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는 소년 코사(Caussat)와 브루엘(Bruel)이 담배를 피우고 놀이를 하는 불량학생인 점을 부각하며 시작한다. 장난감 트럼펫으로 부는 개구쟁이의 즉흥 연주, 어른들의 식후 끽연 흉내, 풍선 두 개로 여성의 가슴을 만드는 트릭 등의 장면들은 아이들이 자유를 만끽하는 아나키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탄 객실 한 켠에서는 그들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젊은 교사 위게(Huguet)가 그 학교에 부임하는 길에 잠을 자는데 그는 영화에서 계속 아이들과 만나면서 권위주의에 젖은 기성세력과 아이들을 잇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그러한 연대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객실은 뒤이어 나오는 기숙사의 숨막히는 스파르타적 공간과 대조된다. 군대 막사나 교도소와 같이 기숙사는 살벌하다. 마루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군대막사나 교도소와 달리 떨어진 침대가 이어지는 기숙사여서 전자와 달리 최소한의 거리는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병원 입원실 정도는 된다는 이야기다. 교사들의 행동도 우리의 군인들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우리 군대와 달리 폭력은 없다. 엄격하게 규율대로 행동하도록 아이들을 훈육하는 학교에서는 규율을 어기면 '품행제로'라고 판단하여 처벌한다. 코사와 브루엘은 기숙사 사감에게 처벌을 당하는데, 교사들은 하나같이 융통성 없는 독재자들로 그려진다. 단 한 사람, 위게만이 학생들과 함께 놀며 호흡을 같이 한다.

 

자유와 저항을 가르치는 선생의 이야기

 

위게와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논다. 운동자도 숙사와 달리 해방 공간이다. 위게는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1895~1976) 흉내를 낸다. 당시 채플린은 아나키스트들이 사랑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정치와 관련되어 나는 아나키스트이다. 나는 정부와 규칙을 증오한다. 나는 우리에 갇힌 동물을 참을 수 없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수업시간인데도 위게는 학생들을 따라 물구나무를 선 상태에서 학교 관리자들을 풍자하는 캐리커처를 그리며, 아이들의 장난을 방해하지 않는다. 물구나무는 아나키즘의 전도된 가치를 상징한다. 그 자리에 관리자들이 들어와 아이들에게 벌칙을 내린다. 다시 운동장. 키가 작은 교장이 온다.

위게가 학생들을 데리고 마을로 소풍을 나가서 재미있게 놀자 권위주의의 전형인 교장은 아이들을 다시 처벌한다. 그러자 코사와 브루엘을 비롯한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소동을 일으킨다. 그들이 놀던 침대 위에서 베개와 침대보의 오리털이 새하얀 눈처럼 날린다. 이윽고 학교 축제가 다가오고 그 자리에 주교나 정부 관리들이 정복 차림으로 참석하는데, 코사와 브루엘들은 지붕 위에서 고함을 지르고 책과 신발 등을 던지며 항의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은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자신들만의 깃발을 높이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하는데 어른들은 그 자리를 도망가듯이 피한다. 아나키즘의 반종교적이고 반국가적인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다. 기성세력이 강요한 획일주의에 반발하는 아이들의 반란에 대해 기성세력은 도망가기에 급급할 뿐이지만 아마도 그들은 곧 다시 돌아올 것이다.

 

「라탈랑트(L'atalante)」(1932)

 

「품행제로」와 쌍을 이루는 작품인 비고의 마지막 영화 「라탈랑트」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신혼부부인 장과 줄리엣은 작은 바지선 ‘라탈랑트’를 타고 세느 강을 따라 여행하다가 마음이 맞지 않아 헤어지지만 남편의 친구인 페레 줄스의 중재로 다시 합쳐진다.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줄리엣이 열차표를 살 때 그녀의 지갑을 훔치려는 도둑과 그를 무자비하게 잡는 중산층들을 비추면서 카메라는 파리의 실업 문제를 보여준다. 그리고 페레 줄스의 몸에 새겨진 ‘경찰에게 죽음을’이라는 문신은 당시 프랑스 빈민들의 구호이자 아나키스트들의 모토였다.

 

고다르, 트뤼포, 프레데릭 와이즈먼으로…

 

모두 합쳐서 3시간 정도의 필름만을 남겼고 생전에는 아마추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데2차 대전 후에 네오레알리스모가 태동하면서부터 시인 아르투르 랭보에 비교될 정도의 재평가를 받은 비고는 1960년대의 장 뤽 고다르를 비롯한 누벨바그 영화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51년 그의 이름을 기린 장 비고 상이 만들어졌고, 장 휙 고다르는 「기관총부대(Les Carabiniers)」를 헌정했고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영국 감독 린지 앤더슨(Lindsay Anderson, 1923~1994)의 「만약에…(if…)」과 함께 「품행제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었다. 특히 자주 아나키스트임을 자처한 앤더슨의 「만약에」는 영국의 사립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억압적인 학교에 맞서는 반항적인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점에서 「품행제로」의 리메이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데릭 와이즈만(Frederick Wiseman, 1930~)
프레데릭 와이즈만(Frederick Wiseman, 1930~)

 

그러나 비고의 참된 후계자는 내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프레데릭 와이즈만(Frederick Wiseman, 1930~)이다. 필라델피아의 고등학교 교육문제를 다룬 「고등학교(High School)」(1968)는 메사추세츠의 정신질환 수용소 문제를 다룬 「티티컷 풍자극(Titicus Follies)」(1967), 캔자스시티의 시립경찰대를 다룬 「법과 질서(Law and Order)」(1969), 뉴욕주의 극빈환자들의 치료문제를 다룬 「병원(Hospital)」(1970), 미 육군 훈련소를 소재로 다룬 「기초 훈련(Basic Training)」(1971), 미시간 주의 성공회 기관을 다룬 「엣센(Essene)」(1972), 멤피스의 법원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 법정(Juvenile Court)」(1973) 등과 함께 공공권력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문제를 다룬 와이즈만의 아나키즘 다큐멘터리의 걸작들이다.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학교영화가 많이 만들어지지만 「품행제로」와 같이 학교 자체를 거부하는 영화가 있는지 나는 모르는데, 우리의 교육환경은 프랑스나 영국의 20세기 초 상황보다도 더욱 반교육적인 것이 아니까?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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