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0:50 (목)
혐오와 냉소의 시대로부터 정치를 보호할 것
혐오와 냉소의 시대로부터 정치를 보호할 것
  • 박강수
  • 승인 2021.06.11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읽기_『정치를 옹호함』
버나드 크릭 지음|이관후 옮김|후마니타스|292쪽

 

 

정치는 네 가지 층위에서 정의된다. 통치 기술로서의 정치, 공적 업무로서의 정치, 권력으로서의 정치, 타협과 합의로서의 정치. 번역자 이관후가 책 말미에 남긴 해설에 따르면 첫 번째 정의인 통치술로서 정치는 가치를 배분하는 권위를 지닌 국가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 공적 업무로서 정치에서는 공적인 활동에 참여할 시민의 의무와 권리가 핵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한나 아렌트로 이어지는 관점이다. 세번째, 권력으로서 정치는 모든 인간 관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 관계의 억압적 속성이 정치의 요체라고 본다. 푸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이다. 마지막 타협과 합의로서 정치에서 정치는 방법론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정치란 문제를 해결하는 “가능성의 기예”다. 책의 저자 버나드 크릭이 ‘옹호’하는 바로 그 정치다.

 

이데올로기는 정치의 종말이다

 

“정치는 행위”이고 “복합적 행위”라는 것이 크릭의 주장이다. 사회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뒤엉킨 집합체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에 끊임없이 시달릴 수밖에 없는데, 이때 폭력과 강압을 피하고 다원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해결책을 찾아나가고자 하는 시도가 곧 정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지루한 조정 작업이고 다양성과 자유를 보존하려는 노력이다. 다양한 것들의 조화를 획일된 통합으로 바꾸려 들고, 이 과정에서 지루한 설득이나 줄다리기 과정은 필요 없다고 여기는 곳에는 정치가 없다. 말하자면, 독재 국가와 전체주의 사회에 결여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다. 이 대목에서 크릭은 오늘날 ‘좋은 정치’의 상수처럼 여겨지는 민주주의마저 정치라는 행위 밑으로 끌어내린다. 나치독일과 중국공산당의 사례에서 나타났듯 인민주권의 원칙과 다수 인민의 지지가 반드시 더 나은 공동체를 보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하나의 정돈된 진리 체계 아래 세계를 끼워 맞춰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생각들은 정치에 대한 위협이 된다. 2~6장에 걸쳐 크릭은 이데올로기, 민주주의, 민족주의, 기술(만능주의), 정치의 친구들(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상대로 정치를 옹호하며 이 사상들 속에 깃든 비정치적∙반정치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이데올로기란 “역사의 열쇠 또는 우주의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나 아렌트)”하는 “유사과학”이다. 크릭은 “만약 우리의 모든 개성과 다양성을 억지스럽게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고자 한다면 그 조직은 극도로 비정상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것이 되고 만다”며 “정치는 고정된 목표들의 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이렇게 쓴다. “이데올로기란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

 

실제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집을 지어라

 

세상을 바꾸겠다는 비전은 추상적 이상으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삶과 욕망 속에서 비롯돼야 한다고 크릭은 강조한다. “비전은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 곧 도박도 하고,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동차 할부금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하지, 추상적인 비전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비판하고 폄하하려는 전도된 욕망에서 출발한,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정치가 빠진 이상은 폭력적인 계몽으로 치닫기 쉽다. 혁명을 노래하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반정치성을 질타하는 그의 목소리는 신랄하다. “그들은 인민의 궁전을 짓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고 싶어 하는 집을 지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인류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지만 ‘실제 사람’을 만나면 몹시 당황하고 어색해 한다.”

정치는 이념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정치는 어떠한 신조나 신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유연하며 지저분하고 복잡한 실천의 연속이다. 정치의 대리인을 자처한 크릭의 논변을 쫓아가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그 자체로 신성한 목표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어떤 통치, 어떤 정치와 짝을 이루는지가 중요하다는 점, 정치인들은 언제나 일을 망칠 뿐이니 전문가와 기술자들에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대안적 상상의 전제적 위험, 민족주의가 사람들의 정념과 결합하면서 인종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등으로 치닫는 순간의 징후 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이 모든 이념과 단절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그것은 반정치적인 생각이다). 다채로운 생각들이 경합하고 조율될 수 있도록 정치의 공간을 확보하고 활용하는 일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중 한 명인 버나드 크릭 경(1929~2008). 사진=블로그 'Dover Beach'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중 한 명인 버나드 크릭 경(1929~2008). 사진=블로그 'Dover Beach'

 

버나드 크릭은 이 책을 1962년에 출간했고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 셋이었다. 그는 70년대 영국 버크벡 대학에서 일반 시민과 노동 계급을 위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강연자로 대중과 만났고, 1997년 노동당이 집권했을 때는 교육부의 요청으로 시민교육에 대한 보고서(「크릭 보고서」)를 집필해 시민 교육이 영국 모든 학교의 공식 과목으로 채택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정치는 행위’라는 자신의 신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한 셈이다. 책의 마지막 7장은 옹호를 넘어 정치에 대한 찬미로 이어진다. 조지 오웰 연구자다운 반어와 비유가 가득한 크릭의 문장들은 정치를 기득권 집단의 더러운 협잡쯤으로 여기는 냉소, 정치 따위 없는 세상이야말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냐는 혐오가 실은 얼마나 게으르고 고리타분한 단견인지 일깨워준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