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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당신을 이어 말한다
  • 이지원
  • 승인 2021.06.04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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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76쪽

 

나/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우리의 발화가 새로운 세계를 가리킨다면 
서로의 말이 이어져 새로운 물결을 만든다면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때 혁명은 시작된다.” 


사회학자 존 맥나이트(John McKnight)의 말처럼 다큐멘터리 감독 이길보라의 신간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기존언어가 아닌, 장애학과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해체하고 재해석한다. 글쓰기와 말하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일상생활의 수많은 부딪힘을 재해석하는 힘이 생겼을 때,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혁명’을 맞이하는지 이 책에서는 저자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이길보라는 코다(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로서 말한다.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에게 기대되는 역할 수행을 하지 않겠다고. ‘도움과 수혜에 감사하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량하고 착한 장애인 혹은 그 가족’이 되라는 사회적 각본을 그는 거부한다. 대신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어 통역과 같은 ‘볼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정부의 ‘덕분에 챌린지’를 비롯해 잘못된 의미를 전달하는 수어 캠페인을 보면서는, 당사자인 농인을 고려하지 않을 때 수어는 기호화되어 소비될 뿐이라고 말한다. 수어 캠페인을 통해 “소수자의 언어를 존중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이라는 자긍심만을 챙긴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또한 이길보라는 임신중지 경험자로서 말한다. 여성에게 죄책감과 수치심을 강요하는 낙태죄에 반대한다고. 낙태죄의 온전한 폐지를 위해 지난해 그는 ‘#나는_낙태했다’ 해시태그 운동을 이끌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과 고민과 글쓰기의 힘을 이 책은 담고 있다. 민감한 주제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때로는 맨 앞에 서서, 말하기와 글쓰기를 이어간다. 용기 내어 누군가 시작한 말을 자신이 이어 말했듯, 또 다른 누군가가 이어 말하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가자고 말한다.  
〈기억의 전쟁〉, 〈반짝이는 박수 소리〉 등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온 저자는 2020년 네덜란드 유학기를 담은 에세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신간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장애인권, 페미니즘, 임신중지, 성폭력, 불법촬영물, 베트남전쟁 등 뜨겁고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저자의 글을 새로 쓰기하며 엮어낸 것으로, 이길보라의 첫 번째 사회비평집이다. 장애학과 페미니즘이라는 두 개의 시선을 통해 일상의 경험과 사회문제들, 역사적 사건의 현재적 의미까지 종횡무진하며 치열하게 사유한 글들을 풀어냈다. 


자기만의 ‘해방 서사’는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장애해방 서사’로 나 자신으로 사는 법을 말하다  


이길보라는 코다다. 농인 부모를 둔 청인을 가리키는 말인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는 이길보라를 비롯한 여러 코다 당사자들을 통해 한국사회에서도 그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길보라는 신문지면과 자신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반짝이는 박수 소리〉, 그리고 동명의 책을 통해 코다의 존재를 꾸준하고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말하기를 시도해왔다. 
장애인 부모의 자녀라는 이유로 학창시절, 한 재력가로부터 매달 10만 원의 후원을 받았던 저자는 늘 칭찬받던 훌륭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여행 등을 통한 대안교육을 택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후원자는 역정을 내며 말한다. “네가 부모를 보살펴야 하지 않냐. 여행은 무슨” 지지와 후원은 그렇게 중단된다. 
오랜 시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었던 저자는 이제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의 ‘장애해방’ 서사를 말한다. 그 일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닌, 후원자가 바랐던 ‘장애인의 착한 자녀’라는 역할 모델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장애를 극복하고’ ‘장애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라고 말하는 ‘장애 극복’의 서사는 장애를 결여된 무언가, 정상의 반대어, 온전치 않음, 고로 극복해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서사 안에서 장애인과 그 가족은 사회가 바라는 고정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장애학을 접하고 ‘장애해방’ 서사를 알게 되면서, 이길보라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만든 ‘장애 극복’의 서사가 문제임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장애학을 통해 자신 삶을 재해석하며, 자신만의 ‘장애해방 서사’를 써내려간다. 세상을 재해석하는 힘을 얻는다. 
이러한 장애해방 서사는 장애인의 삶만을 바꿀까? 해방의 서사는 사회의 고정관념, 공동체에서 강요하는 역할 수행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질문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장애인과 그 가족뿐 아니라 비장애인 모두에게 해방감을 선사하는 새로운 언어와 사유법을 이 책은 선사한다. 


#나는_낙태했다 #불법촬영_out! #ME_TOO 
발화되어야 할 것들은 아직도 너무 많다 
의심과 추측을 꺼내어 씨앗을 만들자 


2016년 한 유명 일간지에 〈#나는_낙태했다〉라는 칼럼이 실린다. 낙태죄 폐지에 목소리를 보태기 위해 저자가 자신의 임신중지 경험을 밝힌 글이었다. 2019년 낙태죄는 마침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2020년 말일까지 관련 법 개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정부는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통해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의 임신중단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입법예고를 발표한다. 이길보라의 4년 전 칼럼 〈#나는_낙태했다〉는 포털의 해당 일간지 메인 화면에 다시 등장했고, 저자는 SNS를 통해 ‘#나는_낙태했다’ 해시태그 운동을 제안한다. 
이길보라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감정이 왜 항상 죄책감과 수치심이어야 하는지 묻는다. 임신중지가 처벌 유무를 떠나 범죄로서 제도를 통해 다루어진다면,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은 죄책감, 수치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재생산에 관한 감정을 자신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의 개정안에 대한 여성계의 거센 반대 속에서 대체입법안들이 계류하다, 2020년 12월 31일이 되면서 낙태죄는 자동 폐기되었다. 관련해 필요한 법규들은 여전히 공백 상태다. 
임신중지를 비롯해, 성폭력, 불법촬영물 등 민감한 주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말하고 글쓰기를 해온 저자를 보며 누군가는 굳이 이런 글까지 써야 하냐고, “몸과 마음이 너덜해진 경험을 구구절절 토해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냐고” 질타를 보낸다. “앞으로 큰일 하려고 할 때 발목 잡힐지도 모르는데” 말을 아껴야 하지 않느냐고 충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고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겠다고. 그렇게 어떤 이를 이어 자신이 말했듯이, 다음 사람도 이어 말하기를 바란다고. 책에서는 이 모든 글쓰기의 과정과 고민들, 더 발화되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들의 정치적 말하기와 글쓰기의 연대가 분명히 이 세계에 좋은 씨앗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하는 것처럼, 이길보라는 그렇게 글쓰기와 말하기, 그리고 연대를 말한다.  


주식을 안 하고는 살 수 없을까? 
자기만의 방과 기본소득,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방 대신 집, 주치의를 갖는 일, 정말 안 되는 일일까? 


“연극을 하는데 원룸에 산 지 20년째예요. 모아둔 돈도 없고요.” 20대이던 시절 이길보라는 예술가를 대상으로 한 공공주택 면접을 보러 갔던 일을 기억한다. 면접장에서 한 여성이 했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모아둔 돈도 없다’는 말은 가난한 한 예술인의 특별한 사연은 아닐 것이다. 가난을 경쟁하면서 입주권을 얻어야 하는 현실에 이길보라는 친구와 경쟁하면서까지 아득바득 살아내고 싶진 않다며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무엇인지 요목조목 짚어낸다. 
주거 문제가 해결되니 삶의 여유가 생기고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공공주택만이 최선은 아니라며 자신에게도 휠체어를 탄 친구들이 편히 방문할 수 있는 널찍한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청년세대에게 필요한 건 ‘방’이 아니라 ‘집’이라고, 얼마큼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그들이 삶을 삶답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너도나도 한다는 주식 열풍에 불안감을 느끼며 공부를 하다가도, 왜 주식을 해야만 하느냐고 묻기도 하고, 무슨 보험을 들어야 하는지 곰곰이 짚어 보다가, 개인이 어떻게 미래를 모두 예측해 보험을 다 들어 둘 수 있냐고 묻기도 한다. 자신 몸의 이력을 잘 아는 주치의를 왜 보통의 사람들은 가질 수 없냐고 묻기도 한다. 의료권에 대해 말하면서는 자신이 유학했던 네덜란드 사회의 의료 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이길보라는 자신 세대의 청년들이 할 법만 고민들을 똑같이 하며, 이 고민들을 정말 개인이 혼자 짊어지는 게 맞느냐고 질문한다.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준비하며 아등바등 살지 않고도 안전한 삶이 가능한 사회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이 책은 질문한다.  


각본 없는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는 여성들! 
그 함께하는 글쓰기의 힘을 말하다 


이길보라는 10대 때 학교를 그만두고, 동남아시아 여행을 하며 길에서 배움을 얻었다. 스스로 자신을 ‘로드스쿨러’라 칭했다. 이후 대학에서는 영화를 전공했고, 소셜 펀딩을 통해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 네덜란드필름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지금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한다. 스스로를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Activist)이자, 예술가(Artist)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말하며, 김문경의 말을 빌려 그 둘을 합친 ‘아티비스트(Artivist)’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자인 이길보라처럼, 각본 없는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고 자신의 길을 용기 있게 걸어 나가는 젊은 여성들이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내고 함께 글을 쓰며 서로를 비춘다. 이길보라는 자신 주변의 여러 여성들의 삶을 소개하고 응원한다. 가수 이랑, 작가 이슬아, 하미나, 이다울 등의 이야기가 이 책 말미에는 소개된다. 사회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인생, ‘성공’한 직업, 생애주기에 따른 삶이 아닌, 각각이 자신만의 길을 걷는, 그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삶에는 언제나 용기 있는 말하기와 함께하는 글쓰기가 있다. 여성들의 글 쓰는 삶의 이야기를 저자의 문장들을 따라 읽다 보면, 마치 서로의 말과 글이 이어져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자기만의 길이 있을 거라고 응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책은 ‘함께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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