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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유럽 선언
사회적 유럽 선언
  • 이지원
  • 승인 2021.06.0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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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크라우치 지음 | 페이퍼로드 | 136쪽

동명의 베스트셀러인 『분노하라』처럼, 한때 우리는 “분노하라”는 말을 진보의 모토로 여겨왔었다. 무관심과 침묵은 최악의 태도이며, 불평등에 분노하고, 차별에 분노하며, 양극화에 분노하고, 그 외 모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에 분노하면서, 합리와 이성이 구분해낸 불의와 부당함에는 주저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뒤집히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증오와 혐오의 감정 아래 저마다 쏟아내는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무관심과 침묵이 최악의 태도라 주장하며, 합리적 의심과 정의라는 말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해댄다. 동시에 목소리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거대한 음모에 싸인 비리와 부조리한 집단이라 공격해댄다. 작게는 어느 청년의 죽음에서부터 크게는 정권 단위의 사건에 이르기까지, 보다 일상적으로는 복지와 차별에 대한 논쟁까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자리를 바꿔 공수 교대하는 이러한 모습은 일관되게 관찰되어진다. 

한때 유럽과 대한민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는 분배와 복지, 차별에 관해 조금이지만 합의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코로나19의 창궐이라는 사건을 포함한 몇 년의 기간 동안 애써 이룬 사회적 동의는 하나씩 종이조작이 되어버렸다. 한때 진보의 주요 도구였던 정의와 분노, 합리적 이성은 그 반대 진영이 즐겨 찾는 도구가 되어버렸고, 진보의 행동은 그게 어느 것이든 증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입을 모아 “자신의 편이 아닌 자를 증오하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이 책은 두 개의 유령 아래 점점 비이성적이 되어가는 사회, 전 지구가 국가라는 벽에 갇혀 극도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현실에 맞서는 하나의 시도다. 불평등과 환경, 팬데믹의 경우까지 현대 사회는 하나의 국가로는 맞설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지 오래다. 그 위기를 넘기 위한 국가 간의 협력 혹은 연대는 발전 도상의 단계에서 이기심과 혐오를 통한 봉쇄에 자리를 내주기 일보직전이다. 코로나19라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파괴시켰고, 또 거꾸로 되돌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팬데믹이 파괴한 분야가 너무 광범위하기에, 발전해나갈 여지를 많이 만들었다는 발상도 가능하다. 

개개인의 역량에 맡긴 채 국가의 개입 없이 코로나19에 맞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같은 식으로, 전 세계에 걸친 위험 앞에 문을 닫아건 하나의 국가가 대항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도 국경과 무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고, 협력도 지속하고 있다. 혐오라는 말과 무관하게, 타인과의 교류를 발전의 계기로 삼는 사람도 여전히 적지 않다. 이 책은 개인, 집단, 국가를 넘어선 전 세계에 걸친 연대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연대의 성공을 위해 국가, 집단, 개인이 추구해야 할 목적을 선언처럼 제시한다. 

우리가 직면한 위협과 두 개의 유령은 이미 국경과 무관하게 세계를 횡행하고 있다. 중도와 진보 진영은 제3의 길이라는 해묵은 이론 뒤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었고, 결코 친하지 않던 신자유주의와 혐오주의가 파편화된 진영을 포섭하기 위해 손을 잡아버렸다. 그리고 이 둘이 보일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유령처럼 배회하며 우리 사회를 증오와 선동의 사회로 바꾸어가고 있다. 책이 제시하는 분석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단 하나다. 혐오와 증오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위기에는 국경을 넘어 맞서야”하며, 우리는 “혐오를 넘은 희망Hope not hate”의 세상을 이루어내야 한다.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중도우파에서 좌파에 걸쳐 파편화된 다수에게, 극우파 중에서 나온 완고한 소수가 승리하는 심각한 결말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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