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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예술계의 맞수를 찾아서-(1)건축
특별기획: 예술계의 맞수를 찾아서-(1)건축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4.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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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인간으로 돌아온 건축...전통재해석 話頭

우리 사회에서 예술계의 흐름이나 지형을 파악하는 일은 늘 선형적이었다. 역사의 부침에 딸, 학파의 형성에 따라 그것은 구획지어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맞수라는 키워드를 꺼내든 이유는 그런 딱딱한 지도 속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롭게 우리 시대 예술의 표정을 읽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앞으로 건축, 미술, 사진, 무용 등의 영역에서 뚜렷한 대척점이나 혹은 비교고찰이 필요한 맞수들을 찾아 제시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주

건축은 예술이면서 실용공학이라 일찍이 제도화돼 광범위한 학자군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한국 현대건축을 들여다보면 그 외연적 풍부함과는 달리, 서구 모더니즘 이후를 추종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지난 1980년대 이후 건축의 사회성과 건축가의 역할에 대한 성찰이 제기됐고, 1990년대 들어서는 그 동안 축적된 것이 겨우 자기 목소리로 나오기 시작한다는 게 건축학 교수들의 여론이다. 따라서 ‘건축계의 맞수’라는 타이틀로 거창한 지형을 그리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눈과 마음을 열고 쳐다보면 제한된 현실의 테두리 내에서 작가별 특징을 대비, 비교, 교차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텅빔과 붐빔-- 승효상 vs 이일훈
한국 근대건축이 김수근-깁중업의 양대산맥에서 뻗어온 만큼 둘의 영향은 여전하다. 헤게모니라는 비판이 있지만, 거기서 걸출한 작가들이 배출되는 걸 부정하긴 어렵다.

승효상은 김수근 계열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될만큼 대중성도 갖췄다. 대표작인 ‘수졸당’은 ‘貧者의 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이 빈한한 철학은 물질적 건축과 선을 긋는 행위였다. 승효상은 건축에 조선 선비들의 절제와 침묵의 정신을 심는 사람이다.

김수근 라인과 대척점에 서있는 김중업 라인에서 승효상과 맞수로 들만한 이는 이일훈을 꼽을 수 있다. 승효상이 성리학적 이상을 접목시켰다면, 이일훈은 도시서민의 정체성을 그것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해부를 통해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승효상이 비움의 보편성을 통해 ‘단독’의 외로움을 넘어선다면,  이일훈은 소통과 나눔이라는, 소박하지만 인간들의 세속성이 풍부한 스타일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대척점을 그린다. ‘자비의 침묵 수도원’,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이 이일훈의 대표작인데, 그것들은 ‘채나눔’이라는 이일훈의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일훈의 방법론이 분명하더라도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모호하다”라는 평론가 함성호 씨의 지적과 같이 평단의 저울은 승효상 쪽으로 무겁게 기울고 있다. 승효상의 전통공간에 대한 탐구나 ‘비움의 미학’은 세대는 다르지만, 민현식과도 견주어볼만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수동과 능동--정기용 vs 이윤하
‘생태주의’는 건축에서도 화두다. ‘흙집’ 건축가로 널리 알려진 정기용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프랑스에서 모더니즘을 배웠지만, 이후 세계를 돌며 전통문화를  연구해왔다. 흙건축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는 그의 건축은 이른바 ‘바람직한 생태적 살림집짓기’라 불린다. 콘크리트집과 달리 정기용의 손을 거쳐간 집들은 단열성과 쾌적성도 뛰어나고, 자동습도조절도 된다. 그는 이런 건축적 지향을 현재 무주군 전체를 향해 쏟아 붓고 있다.

마을 전체를 흙의 에덴으로 꾸미겠다는 그의 계획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시적 안목에서 생태주의 건축을 실현하는 건축가”라는 평을 하게끔 한다. 정기용이 초기 생태건축를 대표한다면 소장 후발주자로 꼽히는 이는 이윤하다. 흙과 나무로 연결된 전통한옥이 이윤하 건축의 理想이다. 그의 건축이 정기용과 차별화되는 건 ‘능동적인 생태주의’를 뚜렷하게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는 풍력·조력 발전기를 이용해 자연에너지를 살이공간 속에 가득 채워넣기로 유명한데 전북 무주에 지은 ‘푸른꿈 학교’는 자연적인 건축이면서 태양광 발전기로 전력을 감당하는 능동적인 생태건축의 대표작이다. 그는 지금도 해외의 생태건축과의 접목을 끊임없이 시도하느라고 분주하다.

꿈과 현실-- 김석철 vs 양윤재
김석철 명지대 교수는 건축가면서 도시설계자라는 점 때문에 특별한 위치에 있다. 김수근과 김중업 밑에서 현대적 조형론과 전통을 접목시키는 법을 배워 예술의 전당을 설계했다. 그러나 후기이자 현재의 김석철은 ‘거시적 차원에서 건축도시환경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최근에는 춘천 다목적 신도시와 송도 신도시 계획에 몰두하고 있다.

김석철의 새만금개발안은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넘어 이를 건축적 상상력으로 타협한 제3의 대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인정을 받는다. 물론 그의 건축설계는 현실화되기 어렵다, 유토피하적이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건축이 꿈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그의 매력이다.  

김석철과 대척점에 두고 논할만한 건축가는 누가 있을까. 특이하게도 전문가들의 대다수가 ‘없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건축적 언어로서 도시설계를 한 유일무이한 건축가라는 평가다. 하지만 도시계획과 설계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케일면에서 봤을 때 김석철은 양윤재 서울대 교수와 견줘진다. 양윤재의 최근작은 진행중에 있는 청계천복원안과 세운상가 재건축이다. 하지만 그의 도시설계는 건축가가 아닌 설계자적인 입장, 즉 순전히 ‘테크노크라트적’인 관점이라는 게 김석철의 낭만적 경향과 명확히 구분된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흔적 등에 대한 예술가적 배려 없이 ‘외과적 수술’만 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계획안으로 볼때 친환경적일 수 있지만, 실제로 기술적인 개발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그는 김석철의 유토피아 논리와 정반대에 서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두개의 고전--조병수 vs 이은영
드물게 해외에서 이름을 날리는 한국건축가로 조병수와 이은영 한양대 교수를 꼽을 수 있다. 조병수는 올해 미국건축협회의 2개의 큰 상을 휩쓸만큼 명민한 해외파로 분류된다. 조병수를 굳이 분류를 하자면 모던적 경향 안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료와 공간을 묘하게 접목시키는 공간언어가 있는 작가”라는 점. 그는 콘크리트 소재를 좋아하지만 자연과의 조화도 중시한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양평군 세월리에 그가 지은 집들이 대표작인데, 나무상자를 엎어놓은 듯한 둔중한 매스가 땅위에 떠있는 형태지만, 이는 동시에 빗물이 땅속으로 움푹 파이고, 짚은 흙냄새가 피어나는 자연과 구분이 되지 않는 집들이기도 하다. 딱딱한 도시형 건물에는 숨쉬는 구멍을 내고 공중정원을 펼치는 등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덧입히고 있다.

이은영 한양대 교수는 1984년 독일로 건너가 16년간 활동한 재독건축가다. 그가 1999년 유럽에서 슈투트가르트 중앙도서관 현상설계에서 유럽 234개 사무소를 제치고 당선된건 획기적인 기록이었다. 그의 수상작은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인상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작품’, ‘단순 명쾌하고 강인한 인상의 디자인’, ‘건축사에 대한 총괄적 이해’라는 평을 받았다. 역사를 통해 누적된 체험이 참선을 하는 곳처럼 고요한 장소인 동시에 글로벌한 접촉의 공간이라는 평가인데, 그를 두고 전문가들은 한국의 건축가 중 고전을 가장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건축가라고 말한다. 코트부스 주정부청사 계획안, 바이마르 시민회관 개축계획안, 쾰른 카톨릭 미술관 계획안, 베를린 중앙역지구 계획안 등도 해외건축의 저명한 상을 휩쓸었었다.

활동과 칩거-- 주대관 vs  최욱 
건축가도 ‘몸소뛰는 형’과 ‘내면 칩거형’으로 분류된다. 이런 관점에서 건축가 주대관과 최욱 서울건축학교 교수를 저울질 해볼만하다. 주대관은 발로 뛰는 ‘문화활동형’이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여 공동작업을 한다. 대표작으로 철암프로젝트가 있다. 철암에 탄광전성시대가 지나가자 지역운동가, 문화운동가, 건축가들이 철암을 ‘대안적 공간’으로 변화시키고자 뭉쳤는데, 주대환은 그 중심에 있었다. 주민들의 집을 부분적으로 개조하기도 하고, 또 전체적인 공간구성도 함께 고민했다.

그런 점에서 주대환은 개인 건축이 아닌 지역주민들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주는 건축에 몰두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40대의 유망주로 꼽히는 최욱은  한옥의 현대화에 골몰한다. 승효상의 비움이 정말 텅 빈 듯한 자족적 언어라면 최욱의 동양취미는 세대간의 인정투쟁의 전략적 산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대표작인 ‘피넘브러’와 ‘세렌디피티’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작품이 주목하는 건 기존 4·3그룹의 틀을 깨고 파편화하는 작업들이라 할 수 있다. 낀 세대로서 그의 작업은 개체적인 자존을 중요시하고, 의미의 혼재, 분석적 성향, 강한 실험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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