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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6] “학교를 권위주의로 통치한다면 민주 시민을 양성할 수 없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46] “학교를 권위주의로 통치한다면 민주 시민을 양성할 수 없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05.3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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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스탱 프레네

아나키즘이 영향을 끼친 가장 중요한 영역 중 하나는 예술과 교육이다. 예술에서 예술가의 개성(독창성)이 강조되듯이 교육에서도 아동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는 아나키스트여야 하고 모든 교육가도 아나키스트여야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예술가나 교육자가 그러한지는 의문이다. 내가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예술과 교육에 특히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아나키즘과 교육학’ 또는 ‘아나키스트 교육학’의 대표에는 보통 스페인의 프란세스크 페레르(Francesc Ferrer, 1859~1909), 브라질의 마리아 라세르다 드 마우라(Maria Lacerda de Moura, 1887~1945), 프랑스의 셀레스탱 프레네(Célestin Freinet, 1896~1966),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 미국의 에버릿 하이머(Everett Reimer, 1910~1998)와 폴 굿맨(Paul Goodman, 1911~1972)과 등이 포함된다. 나는 1970년대부터 그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 1980년대에 이오덕 등과 함께 한 글쓰기교육의 모임에서 그들의 자유교육을 소개해왔다.

 

셀레스탱 프레네(Célestin Freinet, 1896~1966)
셀레스탱 프레네(Célestin Freinet, 1896~1966)

 

그 중 한국에 가장 일찍 적극적으로 소개된 사람은 일리치와 프레네였으나, 최근에 굿맨과 함께 프레네의 교육학에 대한 책이 여러 권 나왔다. 독일 교육학자 디틀린데 바이예가 지은 『프레네 교육학에 기초한 학교 만들기』(2002)가 처음인 것 같은데, 그 뒤로 정훈의 『자발성과 협력의 프레네 교육학』(2009), 황성원의 『표현과 소통의 교육, 셀레스탱 프레네: 프랑스의 새로운 교육』, 박찬영의 『페다고지를 위하여: 프레네의 ‘페다고지 불변요소’읽기』 등이 계속 나왔다. 내용은 거의 동일하고, 이 글에서 주목하는 아나키즘과의 관련이 강조되지 않는 점도 동일하다.

 

학교를 협동원리 기반한 협동체로

 

1896년 프랑스 남부 니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인접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알프스 고지에서 농부들과 함께 생활한 그의 성장 배경은 그의 교육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2년 프레네는 니스교육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 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1915년 장교 후보생으로 징집되어 전투에서 폐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1920년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시골에서 교사로 일하며 지역 생산물을 판매하는 마을 협동조합 설립을 돕기도 했는데, 이는 학교를 협동원리에 기초한 협동체로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 프레네는 아나키즘에 입각한 투쟁적인 생디칼리즘 교원노조에 가입했고 1927년에는 공산당에도 가입했으며 평생 교사의 정치적 참여를 중시했다. 1928년에는 공공교사협동조합을 만들었고 그 단체는 1932년에부터 『프롤레타리아 교육자』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부상으로 호홉기를 다친 그는 당시 교사들처럼 권위적으로 호통을 치는 교육 방식을 택할 수가 없었다. 전쟁은 그에게도 아이들을 권리의식을 갖춘 시민으로 교육하여 다시는 전쟁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삶과 유리되고, 아동의 욕구를 무시하며, 형식과 추상에 젖은 전통 교육을 비판한 그는 몬테소리와 루소, 페스탈로치의 저술 등을 읽고 함부르크의 생활협동체학교와 소련의 학교와 같은 새로운 실험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실험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자유 글쓰기, 인쇄출판, 학교 신문, 학교 간 통신교류 등을 자신의 교육실천 방법으로 삼았다.

 

창조 능력을 기르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라

 

『노동을 통한 교육(L’éducation du travail)』 등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교육학이 생명과 노동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기존 교육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탐구하려는 아동의 활력을 무시했다고 비판하고 노동과 예술을 교육과정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아동을 미래의 인간이자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인간,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자각해 그것을 마주 대하는데 충분히 용감한 인간, 지성을 갖춘 아동이자 인간으로, 탐구자·창조자·작가·수학자·예술가로 아동을 형성하자고 주장한 그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교육 원리를 제시했다. 첫째, 지식을 내 것으로 재창조하는 능력과 삶을 통해 형성되는 지식의 중시, 둘째, 협동과 민주주의에 의한 학교조직의 운영, 셋째, 협력적 일하기를 통한 규율형성(훈육) 문제의 자율적 해결, 넷째, 특정한 계층을 위한 분리교육이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아이들을 주된 교육 대상으로 삼기.

 

『노동을 통한 교육(L’éducation du travail)』
『노동을 통한 교육(L’éducation du travail)』(1947)

 

여기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첫째와 둘째이다. 첫째는 학습 원리로 실험적 모색, 자연스러운 방법, 자유 표현, 협동 학습을 제시했다. 모색은 학생들이 스스로 행동하고 실험하고 조사하고 읽고 참고자료를 선택하고 분류하면서 자신의 일(학습활동)을 하는 것으로 거기서 아이들의 호기심이 생기고, 그들이 교사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란 교과서에 기초한 관례적인 방법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단계에 따라 학습하는 것이다. 둘째는 매주 열리는 전체회의를 통한 민주주의에 기초해 교사를 포함한 학교 구성원 모두가 학교에서의 생활과 일을 실천하도록 했다. 프레네는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미래의 민주주의를 준비할 수 있고, 만일 학교를 권위주의 방식으로 통치한다면 민주 시민을 양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현대학교협회 헌장의 뿌리가 된 프레네

 

그러나 당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1934년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듬 해 그는 방스(Vence)에서 프레네학교를 열어 빈민 자녀나 스페인 내전의 고아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터지면서 비시 정권에 의해 프레네는 정치 선동가로 낙인 찍혀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1년 건강 악화로 풀려났다. 그 뒤 가택에 연금되었음에도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46년 말 다시 문을 연 프레네 학교는 1964년에 실험학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66년에 죽기 전에도 공산당의 비판을 비롯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프레네의 교육사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신념을 계승한 프랑스의 현대학교협회가 1968년에 만든 다음의 현대학교헌장은 프레네의 실천교육학에 입각한 것이다.

“1. 교육은 지식의 축적, 훈련 혹은 조작이 아니라 발달이자 향상이다. 우리는 성인이 된 아이들의 행동뿐 아니라, 사회에서 하나의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할 소명이 있는 교육자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2. 우리는 모든 교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우리 학생들을 의식 있고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전쟁과 인종주의, 그리고 모든 형태의 차별과 인간에 대한 착취가 금지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3. 우리는 교육을 조건 짓는 사회적, 정치적 거대 흐름들 밖에 그 자체로도 충분한 하나의 교육이 있다는 환상을 거부한다.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 부모들의 삶과 노동 조건들이 젊은 세대들을 교육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4. 내일의 학교는 노동학교가 될 것이다. 창조적 노동은, 자유롭게 선택되고 집단이 담당하는 대중교육의 큰 원칙이자 토대이다. 노동과 책임을 통해서 새로워진 학교는 오늘날 서로 분리되어 있는 사회와 문화 속에 완벽하게 편입될 것이다.

5. 학교는 아동을 중심으로 할 것이다. 우리의 도움으로 스스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바로 아동이다. 자연스러운 방법을 통한 자유로운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는 프레네 교육은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며 교양 있는 교육을 허락해주는 조력 공간, 용품, 기술을 준비함으로써 진정한 심리학적, 교육학적 재정립을 수행한다.

6. 기본적으로 실험적인 탐구는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학교 현대화에 대한 우리 노력의 첫째 조건이다. 우리는 경험상 우리가 수업을 하면서 효율적인 것으로 드러난 기준들과 원칙들에 의거해서 우리의 교육운동을 운영한다.

7. 현대학교협회의 교육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공조 노력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을 이용하는데 책임을 진다. 공조하는 삶은 우리의 근본과 노력, 사고로 부양해야 하고, 우리의 공익에 해가 될 모든 사람에 대항하여 우리가 수호해야 하는 우리의 집이자 작업장이다.

8. 우리의 현대학교운동은 동일한 의미에서 일을 하는 모든 단체와 공감,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 활동에 참여한 모든 단체들과의 합법적이고도 효율적인 협력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끊임없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공립학교에 최대한 봉사하고, 여전히 우리의 목표인 교육의 현대화를 앞당기고자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9. 행정과 우리와의 관계. 우리의 수업이 이루어지는 실험실에서, 교원양성센터에서, 도별 혹은 국가의 연수원에서, 우리는 교육학의 현대화를 위해서 우리의 경험을 우리의 동료들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있다

10. 프레네 교육은 본질적으로 국제적이다. 우리는 바로 노동 협력단체들의 원칙에 의거해서 국제적인 차원으로 우리의 노력을 전개시켜 나가고자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국제주의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선언일 뿐 아니라, 노동을 하는데 있어서의 필요성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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