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30 00:30 (토)
안과밖 50호
안과밖 50호
  • 김재호
  • 승인 2021.05.28 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미문학연구회 지음 | 창비 | 496쪽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영미문학을 통한 인종문제의 재조명

미국 제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의 취임식 축시에서 시인 어맨다 고먼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과 자유, 행복을 추구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는 미국의 건국 이상이 “주기적으로 지연”될 수는 있지만 “결코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21세기 미국에서 흑인은 여전히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며 시민권 이전에 생명권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백인이 주도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윤여정이 여우조연상을 받은 반가운 소식도 있었지만, 시상식에 참여한 윤여정은 미국 내 반아시아 정서와 그로 인한 무차별 혐오범죄를 걱정해야 했다. 이를 전 대통령 트럼프의 노골적인 인종주의, 반중, 반이민자 정책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퇴행 상태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제와 노예해방 이후 인종분리정책 및 끈질기게 반복되어온 린치문화, 지금도 계속되는 흑인시민에 대한 백인경찰의 합법적 폭력은 미국의 건국 이상이 마치 영원처럼 지연되는 상황, 그리고 이러한 지연을 초래하는 이념적 근거와 현실적 조건을 냉철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필요를 의식하며 『안과밖』 50호 ‘특집’에서는 영미문학을 통해 인종문제를 재조명하는 논문 세편을 소개한다. 이성호의 논문 「트럼프의 ‘위대한 미국’과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읽는 하나의 방법: 『로빈슨 크루소』의 섭리론과 식민주의」는 기독교적 섭리론이 트럼프의 미국 예외주의 및 백인우월주의의 이념적 근거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 분석을 통해 기독교 섭리주의가 제국주의와 인종주의를 정당화하고, 백인 예외주의에 대한 이성적·합리적 비판을 무력화시키는 오래된 이념 장치임을 보여준다. 박지은의 논문 「다락의 경계 넘기 : 해리엇 제이콥스의 『어느 노예 소녀의 삶에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는 19세기 미국의 대표 노예 서사 중 하나인 제이콥스의 『어느 노예 소녀의 삶에 벌어진 사건들』을 읽는다. 박지은은 특히 제이콥스가 노예주의 추적을 피해 7년 넘게 숨어 지내는 다락 공간이 가진 노예와 자유민, 굴종과 저항의 공존 상태, 그 공존에 내포된 과도기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과도기적 상태인 다락을 탈출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북부지역에 살면서도 온전한 자유 상태로 이행할 수 없는 제이콥스의 상황을 다락 공간의 연장으로 해석하고 여전히 이 다락 공간에 거주하는 셈인 미국 흑인의 현실을 제이콥스의 모습 위에 겹쳐 읽는다. 나은하의 논문 「보이지 않는 하얀 손에 대항하여: 연극 「김씨네 편의점」의 한흑관계 다시 쓰기」는 텔레비전 시트콤으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진 한국계 캐나다 극작가 인스 최의 연극 「김씨네 편의점」을 다룬다. 논문은 부담 없는 코미디로 이해되어온 이 작품을 북미 지역 흑인과 한국계 이민자 사이에 존재하는 오랜 갈등의 역사 그리고 이 역사의 배면에 위치한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의 공모를 드러내는 작품으로 해석하고, 인종 간의 새로운 연대 방식을 모색한다.

 

[포커스]

‘포커스’에서는 학습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알고리즘을 스스로 수정하며 진화하는 AI의 문학창작 가능성을 검토하는 윤미선의 논문 「『길 위 1번지』, AI 제임스의 소설 :「소설의 기술」과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의 글쓰기」를 소개한다. 길 위에서 계속 이동하며 새로운 정보를 수용해 경험을 축적하고 코퍼스 구조를 변경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생산한 『길 위 1번지』를 “창작”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논쟁적 질문에 윤미선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창작론에 기대어 그렇다고 대답한다. 감각적 경험이 의식의 특성을 이루며 소설이란 삶에 대한 의식의 이 독특한 경험을 옮겨 적은 것이라는 제임스의 창작론에 따르면 외부에서 감각정보를 받아들여 그 감각경험을 코퍼스와 알고리즘에 기반해 문장으로 기록하는 AI의 작업 역시 창작이기 때문이다. AI의 창작가능성을 인정하며 윤미선은 AI 문화 생산이 어떤 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포함한 인간 창작의 문제를 답습하고, 어떤 식으로 고유한 창조성을 통해 새로운 문화 창작 양식을 제안할 수 있을지 진지한 토론이 필요한 시점임을 일깨운다.

 

[동향/재조명/시평]

‘동향’에 실린 정유미의 논문 「근대 초기 영국 희곡의 국외 연구동향: 여성과 극장을 중심으로」는 학계와 대중문화에서 반복 재생산되는 “남성 중심의 영국 극장” 패러다임, 즉 근대 초기 극장과 희곡연구에서 여성을 배제해온 문화적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하고 극장문화와 희곡의 창작, 유통 소비에 관여한 여성들의 활동에 주목하는 최근 비평 흐름을 소개한다. 설연지의 논문 「제국의 시민권 : 2020년과 19세기 영국문학 연구」는 19세기 영국문학 분과 내에서 최근 대두된 제국주의와 인종, 시민권 연구의 필요성과 방향성을 검토한다. 빅토리아 영문학이 19세기뿐 아니라 현재에도 견고하게 유지되는 인종주의와 비시민의 문제를 충분히 고찰하지 못했다는 분과 내부의 반성을 소개하고, 이 반성이 대두된 학계 내외의 배경, 제국주의와 시민권 연구의 “지형 변화”를 예고하는 작가와 학자들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재조명’에서는 정은귀의 논문 「루이즈 글릭과 서정시의 귀환: 입장료 1달러 시의 수행성을 다시 생각하며」를 수록한다. 정은귀는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알려지기 전에는 은자로 불릴 만큼 대중적으로도 학계에서도 자주 언급되지 않았던 글릭이 서정시가 폄하되던 시절 자신을 서정시인으로 규정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화려한 수상경력에 비해 충분히 주목받지 못한 글릭에 대한 연구가 아도르노 이후 진지한 비평적 관심을 받지 못한 서정시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시평’은 박한희 변호사의 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의의와 필요성」을 싣는다. 박한희는 이 글에서 2020년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이 재발의되기까지 지난 15년간 이 법안이 발의와 폐기를 거듭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논의의 현주소와 주요 쟁점을 모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절하고 유익한 논문이다.

 

[서평]

‘서평’란에서는 세권의 책을 소개한다. 먼저 신문수가 2017년 소로 탄생 200주년을 맞아 출간된 소로의 전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검토한다. 800면이 넘는 방대한 전기의 구성상 특징을 압축적으로 소개하면서 신문수는 사회 불의에 대한 비판과 대중 저항을 선도하는 한편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해간 소로의 말년을 자세히, 그리고 흥미롭게 조명한 점을 이 전기의 특장점으로 꼽는다. 오길영은 30여년 동안 마끼아벨리를 중심으로 근대 정치사상사를 연구한 곽차섭 교수가 발표한 논문 12편을 엮은 책 『마키아벨리의 꿈』을 점검한다. 이 책이 마끼아벨리에 대한 학계와 대중의 편견을 바로잡고,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마키아벨리즘을 세밀하게 규정하며, 세계질서와 국제법 같은 연구 주제에 적용될 수 있는 마키아벨리즘의 영향력을 검토하는 의미 있는 연구서라고 소개한다. 인권·동물권 기록활동가인 홍은전은 동물이 겪는 억압과 폭력이 장애인이 받는 배제와 차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지적하고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의 연대 필요성을 강조하는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을 소개한다. 작가의 이력과 책의 요지를 꼼꼼히 살피고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의 연대를 주창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동물운동과 장애운동이 충돌하는 장에서 연대의 기회를 창출하는 저자의 성취를 짚어내는 서평은 화제의 저작에 대한 알찬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논문]

‘논문’란에서는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다룬 6편의 논문을 소개한다. 고강일의 논문 「모범적인 소수민, 아시아계 미국 남성성, 그리고 『미국 출생 중국인』」은 미국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은 진 룬 양의 그래픽 노블 『미국 출생 중국인』을 다룬다. 고강일은 특히 작품이 모범적인 소수민 담론에서 유래한 아시아계 미국 남성에 대한 주류사회 이미지와 담론을 반영하는 동시에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곽영빈의 논문 「애도의 우울증적 반복강박과 흩어진 사지의 므네모시네 : 5·18, 사면, 그리고 아비 바르부르크」는 2020년 40주년을 맞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국영화의 재현 방식과 이에 대한 연구를 “애도의 우울증적 반복강박”으로 규정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이 우울증적 반복 강박의 역사적 조건으로 적시한다. 「월터 스콧의 『롭 로이』가 그리는 역사적 대전환」에서 김명환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독특한 성취와 지향점에 촛점을 맞추며 월터 스콧의『롭 로이』를 분석한다. 김명환은 작품이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보존하면서도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미래지향적 민족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한다. 김은형의 논문 「『재미난 집: 가족 희비극』: 가장 개인적인 퀴어 서술의 사회개혁 가능성」은 그래픽 회고록 『재미난 집 : 가족 희비극』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김은형은 주제적으로 편견 위에 세워진 억압적 위계질서를 재편할 사회개혁의 메커니즘으로의 퀴어 개념을 검토하는 한편 형식적으로는 작품을 특징짓는 강박적 서술 구조, 이미지, 텍스트 활용, 페이지 구성 방식에도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고전적 서사 분석 방식과 새로운 형식의 텍스트 분석 방식의 성공적인 결합 예를 보여준다. 박여선의 논문 「기억과 서사,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카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읽기」는 카즈오 이시구로를 탈국민문학적 국제작가로 보면서 『나를 보내지 마』에서 그가 제기한 질문들이 국민문학에 대한 해체적 질문을 넘어 문학, 인간, 가치, 평가 등의 개념을 발본적으로 재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장미정의 논문「동양화에서 색채를 배우다: 월러스 스티븐스의 습작 시절」은 국내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월러스 스티븐스 시학 속 “동양풍”을 분석한다. 장미정은 초기 습작 속 동양화적 색채감과 실험적인 색채언어 사용의 기원을 다양한 사료 및 스티븐스의 초기 시 관련 저작을 통해 추적하며 잘 알려지지 않은 스티븐스 초기 습작시에 대한 드문 연구를 제공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