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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허하라
우리에게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허하라
  • 김재호
  • 승인 2021.05.24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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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 (오늘을 위해 내일을 당겨쓰는 사람들)』 더생각 인문학 시리즈 9_양승광 지음 | 씽크스마트 | 224쪽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니까.”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이 말.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진리인 것처럼만 여겨진다. 일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버릇처럼 말한다. “주어진 시간은 똑같잖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진리의 파급력은 실로 엄청나다. ‘모두에게 시간은 공평하다’는 문장은 ‘그러니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다’와 연결되며, 곧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공정하다’, 나아가 ‘네가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네가 게을렀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게으름’을 비난하기 위해 ‘시간은 공평하다’는 명제를 끌고 들어오기도 한다. 

하루 스물네 시간, 일주일 칠 일, 한 달 삼십 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모두에게 흘러가는 동일한 시간.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정말로 우리는 똑같은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정말로 시간은 공평할까?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는 한국 사회를 당연하게 지배하고 있는 명제에 의문을 던진다. 이 책의 저자 양승광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을지 몰라도 우리가 ‘누리는’ 시간은 공평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출생의 운(luck)이 우리가 마음껏 누려야 할 삶의 시간을 불평등하게 만들었으며, 이 사회는 운(luck)에는 눈감은 채 자유와 공정만을 강조하여 그 불평등을 제도화시켜버렸다고 고발한다.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끌고 나가는 키워드는 ‘자유로운 시간’, 그리고 ‘인간다운 삶’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생존’과 ‘삶’을 계속해서 대비시킨다. 성남시장 은수미가 책 제목으로 ‘Time to Survive, Time to Live'를 제안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양승광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쳤던 시간의 불평등에 대해 조명한다.

양승광은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를 통해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진실 같던 거짓 명제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노동소득자를 옭아매는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등을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특유의 문체로 고발하고 있다. 
한편, 이 책의 추천사 또한 주의 깊게 읽어볼 만하다. 정치, 종교, 문학, NGO의 각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각자의 관점을 가지고 추천사를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짧은 추천사들을 통해 그 영역들이 삶과 시간을, 인간다움과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성남시장 은수미, 소설가 조해진 추천★
시간과 정의에 대한 인문학

여기, 중소기업을 다니는 한 회사원이 있다. 이름은 박개미 씨.

박개미 씨는 막 퇴근하여 집에 들어온 참이다. 씻고 저녁을 먹자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밀린 집안일이 눈에 들어오지만, 박개미 씨는 애써 무시하고 누워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어디선가 ‘남들은 퇴근한 뒤에도 자기계발 하느라 바쁘다는데. 스스로가 한심하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애써 무시해본다. 내일 무리 없이 출근하려면 지금 자야 하는데. 왠지 그냥 자는 것은 너무 아쉬워서 SNS 등을 뒤적거리다가 새벽 1시쯤에야 잠이 든다. 지금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너무나 피곤할 게 뻔한 데도. 

어딘지 익숙하다. 평범한 우리네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저녁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퇴근하면 씻고 집안일을 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걸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몸을 일단 바닥에 누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보며 ‘아, 뭐라도 해야 하는데. 이대로 잠들고 싶진 않다.’ 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온전히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때는 바로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우리 개개인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시간만이 인간이 인간답게 누리는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법정 노동 시간은 물론 법률상 ‘휴게 시간’으로 불리는 점심시간 때에도, 심지어 퇴근한 후에도 노동을 끝내지 못한 채 붙들려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답게 누릴 수 있는 시간, 이 자유시간의 길이는 과연 공평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의 길이는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기, 두 아이가 있다. 김민지와 박현수. 

김민지는 일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집안 살림에 전액장학생을 지원했지만 탈락했다. 대신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은 뒤 카페로 출근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김민지의 4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노동과 공부, 그리고 빚으로 채워진다.

한편 박현수는 자율형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민지와 같은 대학에 들어갔다. 김민지가 대학생이자 카페 알바생으로 살아가는 사이, 해외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의 무급 인턴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박현수의 이력서에 들어갈 문구들이 착실히 쌓여간다. 김민지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그리고 그중에서 자신을 비정규직으로 채용한 곳을 다니며 더 나은 회사의 정규직 준비를 하는 동안 박현수는 무급 인턴으로 일했던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승진하여 경력을 착실히 쌓아나갔다. 같은 시기에 같은 대학을 입학했던 두 사람. 과연 10년 뒤에도 둘은 같은 자리에 서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분명 박현수가 김민지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김민지의 노력이 박현수의 노력보다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김민지가 더 노력했다면 박현수만큼, 아니 박현수보다 높이 올라갈 수 있었을까? 백퍼센트, 그럴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민지와 박현수,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오로지 출생에 달려 있었다. 자율형사립고등학교의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집에서 태어난 박현수와 4년제 대학의 학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던 집에서 태어난 김민지. 이 둘의 출생을 가른 것은 운이었다. 능력도 의지도 아닌 운(運, luck) 말이다. 이 운을 배제하고 이야기하는 공정이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문장과 으레 이어지는 ‘노력하면 다 된다’ 혹은 ‘게으름은 죄다’라는 말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김민지가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한 이유를 김민지의 노력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의 저자 양승광은 우리에게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뻔하디 뻔한 명제에서 벗어나볼 것을 권한다. 앞서 말했던 ‘노력하면 다 된다’와 ‘게으름은 죄다’라는 두 문구는 사실, 선(善)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삶의 양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오롯이 자유롭고 잉여롭게 쓰기 위해서는 우리를 채찍질하는 이런 말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각을 좀 더 넓혀서 시간과 사회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이 책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는 어떻게 해야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진정한 ‘나만의 시간’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또 이와 관련된 사회 문제들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조곤조곤 말을 건네고 있다. 불편한 현실을 바꾸자는 내용의 책은 아니다. 또 어떠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도 아니다. 다만 저자는, <우리의 시간은 공평할까>에 그냥 눈 뜨고 똑바로, 지금의 현실을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을 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과 정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모든 변화는 바로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그런 것에 대해서 자유롭게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고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다. 

이제 다시 한번 나의 하루를 구성하고 있는 시간들을 바라보자. 성과만을 요구하는 사회의 눈이 아닌, 이 세상의 중심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눈으로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가 누리는 시간이 많아질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자. 개인의 삶을 이루는 시간은 삶 그 자체다.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 시간 역시 끝난다. 우리에게 허투루 낭비될 수 있는 시간이란 없다. 더 이상 다른 이를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이용하지 말자. 나만이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우리 자신에게 잉여로울 시간을 허하자. 

<책 속으로>

p15. 인간이란 생존 이상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존재일 테지만, 우리 삶은 생존에 매여 있습니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동 시간은 그야말로 생존 자체를 위한 시간에 불과하니까요. 자유를 위한 시간은 그가 처해 있는 신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유를 위한 시간뿐일까요? 노동 시간도 내가 얼마나 가졌는지, 내 신분이 무엇인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이 모두가 삶의 불평등이며 시간의 불평등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불평등을 심화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시간, 우리가 누리는 시간에 관해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아주 가볍게 말이죠.
당신께 뭐라 말을 걸어야 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불평등한 현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재미도 없거니와, 이미 좋은 책이 많이 나와 있거든요. 그보다는 절망적인 현실만 재확인하게 될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습니다. 눈감은 채 하는 말들은 허공만 떠돌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 중간에서 외줄을 타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외줄타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더 정성을 들였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거든요.

p46. 물론 모든 시간이 내게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헛되지 않은 시간은 없노라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그건 이 시간들을 다 보내고 난 다음의 이야기 아닐까요? 사후적 평가지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과 일을 하는 시간, 이렇게 생존을 위한 시간들은 우리 삶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니까요. 생존은 삶의 전제가 되지만, 생존이 삶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생존에 무언가 다른 것이 더해져야 합니다. 친한 친구와 밥을 먹는다든가, 사랑하는 사람과 잠을 잔다든가, 월급으로 가족이 외식을 한다든가 말이죠. 시간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내 삶이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짐을 말합니다. 의미 있는 시간이 많아질 때, 나는 나 자신을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p55. 문제는 모든 이가 자신이 자본소득자가 될지, 노동소득자가 될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본소득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만 이 결정을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노동소득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 노동 시간의 질이 다른 노동소득자와 같아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본소득자가 될 수 있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을 하는 이에게 노동 시간은 생존에 매여 있는 시간이 아니거든요. 노동하지 않아도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 상태, 이때 노동 시간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시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이 누리는 시간은 공평하다”라는 명제는 거짓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본소득자와 노동소득자에게 생존을 위해 복무하는 시간, 그리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삶의 선택지에 자본소득자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p153. “삶을 확률에 가두는 순간,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확률이 높은 일은 달성한다 해도 희열이 없으며, 확률이 낮은 일은 계획에서 사라집니다. 희열이 없는 삶, 슬픔이 없는 삶은 곧 살아갈 이유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확률대로 결과가 나올 수도, 확률을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확률이 있다는 것과 우리의 삶은 확률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확률에 의존해 살아갈 것이냐, 그러지 않을 것이냐 입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못 먹어도 GO!”
잘 안되면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 인생이 경주도 아니니까요. 혹시나 잘되었다면 뒤를 보고 손을 내밀어 줍시다. 당신을 잊은 게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p182. 
게으름이 죄라는 인식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립니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것, 좋은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는 것,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공정한 시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게으르다는 말이 비난이라 적절치 못하다면, 긍정적으로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노력하면 다 된다는 말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대학도 갈 수 있고, 좋은 직장에도 취업할 수 있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도 전환될 수 있고, 많은 월급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게으름과 노력은 이 사회가 쓰는 용법으로 볼 때 일란성 쌍생아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노력으로 모든 게 바뀔 수 있을까요? 의자 수가 사람 수보다 적은 게임에서, 모든 이가 노력한다고 해서 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 구조에서 야기된 결과를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p200. 
결국 인간다운 생활이란 자신의 노력으로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국가는 개개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야 합니다.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란 생존이 보장되는 사회만을 의미하지 않아요. 나의 노력이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장애로 인해, 부모의 소득이나 자산으로 인해 폄하되지 않는 사회까지 의미합니다. 들인 시간과 노력이 장애나 빈부 때문에 좌절된다면 삶의 주인일 수 없습니다.
각 개인이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 국가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될 때만 공정한 사회, 공정한 국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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