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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 폭력
대중과 폭력
  • 교수신문
  • 승인 2021.05.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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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지음 | 후마니타스 | 196쪽

뜨거웠던 1991년 5월 투쟁 30주년

올해는 1991년 5월 투쟁 30주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1987년 민주화의 성과가 여전히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으며 그 한계에 대해 다시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1987년 이후의 시기 분석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1991년 5월 투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기 중요한 시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87년 6월 항쟁부터 1991년 5월에 이르는 4년여 동안의 기간은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착적으로 대립했던 시기로, 1991년 5월과 6월에 걸쳐 벌어진 60여 일간의 투쟁은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분수령이었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 세력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뒤이은 총선에서 형성된 여소야대 국면으로 위기에 처한 보수 진영은 3당 합당을 통해 제도 내 힘 관계를 뒤집었고, 이를 기반으로 공안 통치와 권위주의 통치로 회귀하려 했는데, 91년 5월 투쟁은 이 같은 흐름의 노태우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간 6공화국 최대의 대중투쟁이다.

1991년 봄, 백골단의 과잉 진압과 폭력으로 명지대생 강경대가 사망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사했으며, 성균관대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해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차태권, 정상순, 이진희, 석광수 등 학생, 노동자, 빈민 11명이 연이어 분신했다.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14명이 사망하고 전국적으로 2300여회의 집회가 열리는 등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가 벌어지며, 91년 5월은 ‘제2의 6월 항쟁’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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