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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순이가 아니라,
갑순이가 아니라,
  • 교수신문
  • 승인 2021.05.2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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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배 지음 | 다사람더사람 | 370쪽

저자는 ‘한국 최대의 인문지리서’ 130여권을 펴낸 조부님의 슬하에서 6년 간 서당공부만을 한 영향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어서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에서 사회 비판, 문화 비판 등 현대철학과 중국사상 등을 폭넓게 전공하고 귀국하여, 무엇보다 - 권력관계, 이해(利害)관계 그리고 이해(理解)관계와 이어지는 - ‘분리’와 ‘결합’의 개념 쌍으로 지금여기의 생생한 ‘잘못 분리’, ‘잘못 함께’ 속의 소외 현실을 폭넓게 물어 밝혀 풀어가는 관심에서 꾸준히 연구와 강의, 사회운동을 해왔다.

이러한 관심은 전달학문이기나 사변학문이기를 벗어나 구체적인 ‘비-인간’, ‘비-세상’의 생생한 소외 현장에 주목하면서 - 물음의 대상이나 접근방식의 차원에서든, 문체의 차원에서든 - 자유롭게 ‘동문서문’(東問西問) 종횡무진 물어감으로 이어진다. 학문과 현실 사이의 틈을 잇고 ‘세상크기’와 ‘사람크기’를 구체적으로 물어 밝혀 키우려는 ‘함 있는 앎, 앎 있는 함’의 맥락에서 〈갑순이가 아니라,〉가 태어남은 이러한 관심의 자연스런 연장이리.

〈갑순이가 아니라,〉는 우리사회에 만연하여 ‘많이 낯익은’ ‘불통 문화’, ‘갑질 문화’ 속의 인간 소외를 생생한 사례들로 ‘조금은 낯설게’ 물어 파헤쳐가되, 생생한 ‘진경 사회’에 대한 진단에 멈추지 않고 일정한 출구를 제시한다. ‘같이 달리, 달리 같이’의, 일종의 ‘문화 백신’을 생각하는 〈갑순이가 아니라,〉는 그러나 다른 생각이나 물음의 여지를 넓게 남기려 한다. 삶의 절실한 현장을 의미와 흥미의 두 ‘맛’(味)으로 접근해가므로, 쉽지만도 어렵지만도 않다는 〈갑순이가 아니라,〉는 일간, 주간, 월간의 종합시사지를 읽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공감하면서 자연스레 ‘같이 생각하며 물어가는 책’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불통 문화’, ‘갑질 문화’에 - 피해자로서든 가해자로서든 - 직간접으로 ‘연루된’ 다양한 개인 분들이나 집단, 기관, 단체들은 물론, 무의미한 일상에 휩쓸림을 염려하거나 부조리한 ‘비-세상’ 속의 ‘비-인간’, ‘비-인간’ 속의 ‘비-세상’를 고민해온 각계각층의 개인 분들과 집단, 기관, 단체들에 일독을 권한다. 나아가 ‘세상크기’, ‘사람크기’를 다양하게 다루고 있는 대학의 각종 인문 교양과목뿐만 아니라, ‘다를 수 있는 같음, 같을 수 있는 다름’의 수평적 소통문화에 대하여 생각을 함께 맘껏 열고 나누고 키워가는 각종 세미나나 토론회의 ‘서로배움터’에도 추천 드린다.

나/너, 입(口), 도(道, hodos, logos, ‘또한’), 노(No), 돈, 다/더, 다 나/다 너, 더 나/더 너, 다 입/더 입, 나 더/너 더, 난/넌 등 ‘윤리적-정치적 사회화’의 시원(始原, arche) 범주들을 우리의 ‘큰 사람’ 세종대왕이 지은, 우리의 ‘큰 글’ 한글의 ㄱ, ㄴ, ㄷ만으로 표현해 봄.

예를 들어, ㄱ은 ‘ㅓ’, ㄴ은 ‘ㅏ’나 ‘ㅗ’로도 쓰면, ㄴ+ㄴ은 ‘나’나 ‘노’, 그리고 ㄴ+ㄱ은 ‘너’나 ‘口’, ㄷ+ㄱ은 ‘더’, ㄷ+ㄴ은 ‘다’나 ‘도’, ㄴ+ㄴ+ㄴ은 ‘난’, ㄴ+ㄱ+ㄴ은 ‘넌’, 나아가, ㄷ+ㄴ+ㄴ은 ‘돈’ 등이 됨.

나(ㄴㄴ)/너(ㄴㄱ), 다(ㄷㄴ)/더(ㄷㄱ)를 함께 표현하는 로고의 파랑과 노랑은 하늘과 땅 혹은 자연과 인간의 색. 서로의 ‘다름’을 서로의 ‘같음’으로 존중하는 이들 ‘다른 같은’ 혹은 ‘같은 다른’ 색들은 ‘다름 있는 같음’과 ‘같음 있는 다름’을 나타냄.

‘다를 수 있는 같음’과 ‘같을 수 있는 다름’은 ‘수평 소통’의 기초로 ‘더 함께’ 속에 ‘더 존재’, ‘더 삶’을 향함. ‘더 너’ 속에 ‘더 나’, ‘더 나’ 속에 ‘더 너’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길. 또 사람의 입이라면 다 ‘말하고 먹는 입’임을 알고(theoria) 실천하는(praxis) ‘다 입, 더 입’의 길은 ‘다 사람, 더 사람’의 토대.

흰 색과 검은 색은 ‘많은 작은’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의 밝기’를 상징할 뿐 아니라, ‘작은 밥’의 사람크기와 ‘작은 법’의 세상크기 속에 할 일 없어 ‘흰 손’인 ‘백수’(白手)나 머리에 쓴 것 없어 ‘검은 머리’인 ‘검수’(黔首)를 표현.

‘물질이나 기호의 막힘없는 흐름’이 소통(疏通). 소통은 말길이든, 밥길이든, 바람길이든, 물길이든, 트인 혹은 트는 흐름. ‘더 세상’ 속의 ‘더 사람’, 혹은 ‘더 사람’ 속의 ‘더 세상’의 기초는 ‘더 소통’.

‘더 소통’의 외적, 내적 제 전제들을 ‘더’ 물어, 찾아, 알아(知), 걸으려는(行) ‘소통철학하기’는 더 ‘가르고 가리는’(krinein) 비판(批判)의 정신으로, 정의(定義: de-finition, ‘경계 그어 나누기’) 속의 정의(正義: Dike; ‘바름’, ‘옳음’의 여신), 혹은 정의(正義) 속의 정의(定義)의 전제들을 물으면서, ‘남들이 철학한 결과들’을 번역, 전달, 해석을 주로 하는 방법의 ‘안’(in)에 갇힘이 ‘안’(not)이려 함.

사람과 사람-을 덜 ‘나누어’(수직 불통의 ‘따로’) 사람과 사람-이 더 ‘나누기’(수평 소통의 ‘함께’)를 위하여, ‘이고 아님’, ‘좋고 나쁨’을 잘 ‘나누는’(사리, 논리, 윤리, 情理의 Logos) 비판력이 ‘소통철학하기’의 중요한 토대. 전통철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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