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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철학, 어떻게 정당화되나
'우리'만의 철학, 어떻게 정당화되나
  • 장은주 영산대
  • 승인 2004.11.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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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선생의 세 번째 글(교수신문 333호)에 다시 답한다

만약 서양철학을 단지 비판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철학도가 있다면 그는 헛공부를 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적어도 서양철학의 발전 원동력은 그 핵심에서 비판이고, 나아가 비판의 비판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고 아마 김상봉 선생도 틀림없이, 이 토론이 단순히 서양철학 그 자체에 대한 숭배나 거부의 문제를 쟁점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고 본다. 서양과는 다른 역사적 경험과 문화와 사회 조건에서 철학을 하는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해야만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서양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지금 온 지구의 정신세계마저도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철학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아마도 이런 문제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지하게 답을 찾아야 할 문제들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해야 한다. 김 선생의 지적처럼, 우리가 남의 구린내 나는 엉덩이만 핥아서야 되겠는가. 김 선생의 우려와는 달리, 나나 김 선생이나 상처가 다르지 않고 출발점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 천학인 나는 아직 답을 모른다. 김 선생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 및 존재구속성은 철학의 근원적인 출발점 자체를 서양이나 중국과는 다르게 지시해 준다. 그러나 나는, 김 선생의 시도가 성과를 내기를 기원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다.

나의 문제제기는 일단은 소극적인 것이다. 예컨대 지난 번 글에서 김 선생은 데리다가 자기상실의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가련하게도”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에서만 가능한 서로주체성에는 이를 수 없다고 못 박는다. 나도 데리다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데리다를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 기대하지도 초대하지도 않은 완전히 낯선 방문자에게도 스스로를 열어젖히자는 데리다의 ‘환대’ 개념은, 그것이 얼마나 현실의 실천적 경향에서 출발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규범적으로는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의 가장 성숙한 한 차원을 안내하고 있다. 과연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우리’의 어떤 역사적-존재론적 경험 그 자체 덕분에, 단지 ‘우리’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철학화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쉽게 생각해 보자. 모든 인간은 사랑을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 상실, 곧 “자기의 주체성을 타자에게 양도”하는 경험 속에서만 성립한다. 그리고 그런 상실 속에서 다시 자기를 확인하고 보존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주체성과 세계성을 경험하는 것이 사랑이다. 서양 사람들도 사랑은 한다. 헤겔은 바로 이런 사랑의 경험에서 출발해서 서로주체적인 ‘인정’ 개념을 철학적으로 가공했다. 우리가 헤겔의 의식철학적 한계에 대해 눈을 감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나 그런 한계가 과연 서양철학의 본원적 한계일까. 자유는 단순한 주체-객체의 관계를 통해서는 제대로 포착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상호주체적 지평 속에서만 세계도 만나고 타인도 만나며 또한 나 자신에도 이를 수 있다는 것, 이에 대한 통찰은 해석학이든 실용주의든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든 서양 현대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조금은 더 자기반성적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철학을 해야 한다는 데서 무턱대고 출발하지는 말고, 도대체 왜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해야 한다고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메타적 물음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일이나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꼭 ‘독일다운’ 또는 ‘프랑스다운’ 철학을 해야 한다고 출발하지는 않는다. 나는 혹시 ‘우리’의 철학을 해야 한다는 그 강박적 출발점마저도 ‘우리’를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주변적’이라고 내동댕이치며 또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만든 (김 선생이 극복하고 싶어 하는) 어떤 ‘문화적 식민주의’의 함정이 아닐지 의심해 본다. 그 출발점은 기본적으로 ‘저들은 저런데 우리는?’하는 식의 타자(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의 산물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반작용은 곧잘 ‘너희들 못지않게, 아니 너희들 보다 더, 우리도(가) 훌륭하다’는 식의 어떤 불필요하게 강할 수도 있는 ‘자기’에 대한 주장으로 나가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열을 내던 나치 시절의 하이데거나 ‘미영귀축’을 몰아내야 한다고 선동했던 일본의 군국주의 지식인들도, 그리고 ‘한국적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이나 ‘주체사상’의 정초자들도 바로 그와 같은 ‘자기주장담론’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혹시 함정이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런 함정을 피하려면 우리는 무언가 다른 출발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단순히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에서 출발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다만 ‘예술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어떤 고유성을 갖는, 어지럽게 엇갈래진 문제들의 복합체 속에서 살아가는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체’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을 숭배할 필요도 없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를 스스로 비하할 필요도 없고 치켜세울 필요도 없다. 도대체가 그런 문제틀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들 중에는 서양에서 배워서 해결할 것도 있고, 전통을 재가공해서 풀어야 할 것도 있으며, 새롭고 창조적인 지혜를 짜내어서 헤쳐가야 할 것도 있다. 서양보다 잘났거나 못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또 수입품이냐 토산품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우리’가 그 많은 어지러운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우리’의 문제해결에 제대로 기여하는 학문만이 좋은 학문이고 진짜 가치 있는 ‘우리’의 학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출발한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시도되는 수많은 인문ㆍ사회과학적 작업들에 대한 분명한 평가의 잣대를 얻을 수 있다. 바로 ‘문제해결적 합리성’이다. 학문적 반성의 대상인 ‘우리’의 역사, 문화적 전통, 사회의 진화 과정과 구조, 삶의 양식 등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런 것들과도 다르고 또 서양을 포함한 다른 어느 나라의 것들과도 다르다. ‘우리’는 예술적으로 특수한 대상이다. 그래서 무턱대고 ‘선진적인’ 서양이나 중국의 학문이 그 자체로 ‘우리’의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그 어리석음은, 단순히 어떤 사대주의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치 빛나는 성과를 낸 자연과학의 발전에 압도된 나머지 자연과학의 방법을 사회에도 그대로 도입하면 비슷한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다. 탐구 대상의 특수성과 고유성에 주목하는 것, 그것은 모든 제대로 된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학문적 사대주의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학문적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학문적 사대주의를 극복하는 참된 길은 단순히 어떤 강한, 충분히 합리적-이론적이라기보다는 ‘미학적’으로 보이는, ‘자기’나 ‘우리’에 대한 주장에 있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된 문제해결적 합리성을 갖추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는 우리는 아직 ‘서양’에서 좀 더 배울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적으로 특수한 ‘우리’지만, 그것이 단순히 ‘예술’의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시인’은 많아도 ‘과학자’가 너무 없다.

장은주/영산대ㆍ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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