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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현 미국솔즈베리대 교수] "중력에 빨려 들어간 미국의 민주주의, 선거가 도박판이 됐다”
[남태현 미국솔즈베리대 교수] "중력에 빨려 들어간 미국의 민주주의, 선거가 도박판이 됐다”
  • 박강수
  • 승인 2021.05.2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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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미국정치평전』(오월의봄, 2021) 쓴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

故 노회찬 전 의원은 2018년 2월 국회 연설 자리에서 신문지만한 크기의 투표 용지를 꺼내 들며 “2016년 대선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의 투표용지”라고 설명했다. 그의 연설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투표용지는 기표란이 26개다. 한국 지방선거는 7개다. 26대 7. 이것이 미국 유권자와 한국 유권자의 권력의 차이다”.

미국은 선거의 나라다. 상원 100명, 하원 435명의 연방의원을 선거로 뽑고 주정부의 각종 행정담당과 교육감, 판검사, 주의회 의원, 카운티 등 지역 정부 시장, 시의원을 모두 선거로 뽑는다. 선출직 자리를 모두 합산하면 약 60만개라는 추정 값이 나온다. 미국인 500명 중 한 명은 선출직이라는 말이다. 거대한 국가의 권력을 연방제(연방정부-주정부)로 쪼개고, 삼권분립으로 쪼개고, 다시 수많은 선거로 쪼개 시민들에게 돌려줬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이상향일까.

 

 

“(미국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평가해보고 싶었다”. 지난 3월 『미국정치평전』(오월의봄)을 펴낸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과)의 시선은 다르다. 이를테면 이 책의 2장 마지막 챕터 제목은 “돈이 결정한다”다. 미국의 선거는 그야말로 ‘돈잔치’다. 지난해 대선을 비롯한 각종 선거에 투입된 자금만 140억 달러다. 한화로 15조원을 넘는다. 2018년 기준 하원의원 당선자는 평균 200만 달러, 상원 당선자는 평균 1천600만 달러를 썼다. 실제 미국 116대 의회의 절반 이상이 백만장자다. 남 교수는 “미국에서 선거는 막대한 판돈이 없으면 끼기도 힘든 도박판이 되어 간다”고 개탄한다. 선거와 각종 견제장치로 정치권력을 쪼개 자본의 손아귀에 넘겨준 셈이다. 남 교수는 “미국 민주주의가 가장 짙은 먹구름”이라고 표현했다.

남 교수는 미국 아메리칸대와 캔자스대에서 정치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간 『왜 정치는 우리를 배신하는가』(창비, 2014), 『세계의 정치는 어떻게 움직이는가』(창비, 2017) 등 저작에서 정치의 실패를 고찰해 온 그는 이번 저서에서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실패의 연원을 추적한다. 그 바탕에는 ‘합법화된 금권선거’와 ‘중력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남태현 교수는 미국 워싱턴 DC 근교에 잇는 솔즈베리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현재 주된 연구 주제는 '시위와 억압'이다. 사진=남태현
남태현 교수는 미국 워싱턴 DC 근교에 잇는 솔즈베리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다. 현재 주된 연구 주제는 '시위와 억압'이다. 사진=남태현

 

△ 키워드는 ‘중력 민주주의’다. 민주당∙공화당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견고한 양당제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여기서 ‘중력’은 어떤 힘을 말하나?

“이념 스펙트럼 정중앙으로 모든 정치 세력을 빨아들이는 힘이다. 실제 중력처럼 그 힘이 너무 뿌리깊고 일상적이라 자각하기 어렵고 거스르기도 힘들다. ‘제3지대 정당, 정치인’이 살아남지 못하는 미국 정치의 현실을 설명해 준다. 사회주의자이자 무소속 상원의원인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2016년과 2020년 두 번이나 돌풍을 일으켰지만 결국 민주당 정통세력에 무릎을 꿇었다. 같은 경향은 유권자들에게도 나타난다. 미국 시민들은 양당 외에는 관심이 없다. 사회주의는 꿈도 꾸지 않는다. 꾸더라도 잠시 조는 정도랄까. 우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정치적 사상, 정책이 발전하기 힘들다.”

 

△ 중력이 양당을 빨아들이는 중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 구호 계획’, ‘미국 일자리 계획’, ‘미국 가족 계획’ 등 연이은 대규모 재정지출 계획을 발표했다. 평가한다면?

“뉴딜 정책에 버금가는 큰 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극적인 변화다. 하지만 ‘민주당이라서 가능했다’, ‘공화당과는 다르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장 전임자인 오바마, 클린턴 시절 민주당 정부도 ‘작은 정부’라는 레이건 공화당 기조를 따랐다. 즉, 정당의 차이보다는 시대의 변화를 대변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 바이든의 구상은 정부가 큰 돈을 푸는 방식이다. 기업의 국영화, 공격적 부의 재분배 등 사회주의적 모델은 아니다. 새롭지만,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변화다. 미국의 양당 모두가 지키고자 하는 바로 그 체제다. 세계 초강대국으로서 정치력 유지라는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 중국과의 경쟁, 북한에 비핵화 요구 등을 이어가고 있다. 공화당 대통령인지 민주당 대통령인지 구별이 안 된다.”

 

사진=연합
2018년 2월 6일 국회 비교섭단체 연설 과정에서 미국 투표 용지를 꺼내 보이는 故 노회찬 전 의원. 사진=연합

 

△ 공화당은 점점 더 우경화가 심해지면서 당내 극우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비판을 들어 왔다. 네오콘-티파티-트럼프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공화당을 끌어들이는 중력은 중도가 아니라 오른쪽 극단인 거 같다.

“맞다. 중력의 오른쪽에 균열이 생겼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노예제를 놓고 휘그당에 균열이 생겨 결국 몰락했다. 휘그당 내 노예제 반대론자들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모여 공화당을 만들었다. 새로운 중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트럼프의 반동적 균열은 트럼프 퇴임 이후에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던 리즈 체니 공화당 하원의원은 의원총회 의장직 자리를 뺏겼고 트럼프 열성 지지자(엘리스 스테파닉)가 자리를 꿰찼다. 공화당의 전직 지도자들이 새로운 정당을 구상하고 있기도 하다. 휘그당 몰락-공화당 등장의 길을 갈지, 공화당이 이 위기를 넘길지는 모른다.

중력 민주주의가 강하다면 트럼프 쪽 극단이 힘을 잃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선, 트럼피즘이 종교화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트럼피즘이 중력 민주주의를 이기고 공화당을 완전히 접수할 수도 있다. 종교는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하니까. 둘째, 공화당은 스스로 극단적 정치 세력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정치제도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게리맨더링(당선에 유리하게 지역구 구획을 조정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민주당과 경쟁에서 우위를 얻고자 그랬지만 이제 자신이 덫에 빠진 꼴이다. 빠져 나오지 못하면 트럼피즘에 완전히 잠식당할 가능성도 크다.”

 

△ 책에서도 지적했듯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금권선거다. 기업, 노조, 각종 이해단체가 벌이는 초월적 규모의 로비와 후원이 미국 정치의 기본 틀로 자리잡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여러 권의 책으로 풀어도 모자랄 듯 하지만 최근의 계기는 연방대법원의 결정이다. 2010년 1월 내려진 ‘시민 연합 대 미연방선관위(Citizens United vs. FEC)’ 사건 대법원판결로 기업에게도 사람처럼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다. 정치 후원도 표현의 자유로 보는 미국 문화가 합쳐지며 폭발적 효과를 냈다. 기업, 노조 등 누구라도 제한 없이 선거자금을 모을 수 있는 ‘슈퍼팩(Super PAC, 미국의 민간 정치 자금 단체)’이라는 괴물의 탄생이다. 여기에 미국식 자본주의가 한몫 했음은 물론이다. 무한경쟁, 시장중심 기업존중의 자본주의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이런 일로 이어졌다. 이제는 현실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민주체제의 가장 큰 먹구름이라고 할 수 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가운데). 사진=로이터/연합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가운데). 사진=로이터/연합

 

△ 불법 뇌물을 양성화하고, ‘돈의 힘’을 ‘선용(善用)’하는 활로를 열어주는 등, 로비-후원 정치의 긍정적 의미는 없을까?

“’누가, 얼마나 냈는지 투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니 감시할 수 있고 부패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은 억지다. 합법, 불법을 떠나 돈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고 이는 바로 민주체제의 정의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유권자의 한 표보다 지갑이 무거워지는 것이다. 돈 흐름이 투명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슈퍼팩 같은 경우 기부자를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정치자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하자는 목소리가 가끔 나온다. 어불성설이다. 돈이 들지 않는 정치를 추구하는 게 맞다.”

 

△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한 ‘불확실성’을 제도화한 체제”라고 설명하면서 ‘이상하다 싶은 의견’까지도 제도권 안으로 포섭하는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고 썼다. 한국 언론을 연일 채우는 정치 소식을 보면 ‘문빠’, ‘태극기 부대’, ‘이대남과 이대녀’ 등 다른 목소리에 대한 미움이 점점 커져가는 것 같다.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권에 흡수되는 게 좋다. 다름을 인정하고 합의를 찾는 게 정치, 특히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다름이 대결로 불거지면 더더욱 정치권에 포섭돼야 한다. 그러라고 세금으로 정치인들 월급을 주고 있지 않나. 정치인들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다름을 논하고 합의를 찾아야 한다. 지면 승복도 하고, 이겨도 조심하고.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게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업을 소홀히 하는 정치인, 대결 국면에서 미움을 이용하기 바쁜 정치인이 많다. 이데올로기의 차이, 거기서 파생되는 정책의 차이를 다투는 일은 복잡하고 쉽지 않다. 대신 감정싸움은 목소리만 크면 되니 쉽다. 언론에 보도도 잘 된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도 감정싸움에 바쁘다. 감정싸움을 하다 보면 선동을 하게 되고, 선동은 유권자의 감정을 다시 격하게 만든다. 악순환이다. 정작 필요한 정책적 다툼은 흔치 않다. 정치인 스스로 자기가 갈 방향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 승자 독식 선거제, 강력한 거대양당, 참여가 제한된 소수자 등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지적한 많은 부분은 한국의 현재 혹은 미래처럼도 보인다.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민의를 대표하지 못하고 정치가 실패하면 민주주의는 자해를 하는 것 같다(트럼프와 박근혜의 당선처럼). 이를 막기 위해 한국의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람들이) 못난 정치인 욕을 한다. 맞다. 욕먹을 짓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런 정치인은 유권자의 지지가 있어 존재한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저런 정치인이 활개를 치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책을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궁리하는 정치인도 많다. 이들에 칭찬이 너무 인색한 것은 아닌지도 돌아봐야 한다.

의견이 다른 이들도 우리 이웃임을 잊지 않는 일도 필요하다. 태극기 집회 참석자를 비웃는 모습을 자주 봤다. 동성애자 저주도 하고 안티 페미니스트라는 딱지도 남발한다. 어떤 이유에서 화가 날 수는 있다. 그렇다고 이웃도 화나게 한다면 공존은 그만큼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공존은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공격으로는 논쟁에서 이길 수도 없고, 이기더라도 남는 것이 없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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