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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전3권)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전3권)
  • 김재호
  • 승인 2021.05.2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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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알레비 지음 |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464쪽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리주의는 불쾌한 대상인 것처럼 배척되는 경향이 있어......

엘리 알레비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은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철학적 급진주의가 태어나 형체를 갖춘 과정을 추적한 연구다. 알레비는 1748년부터 1832년에 걸친 벤담의 생애를 세 부분으로 구획하여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분석하고 서술했다. 제1권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벤담의 젊은 시절을 다루면서, 공리주의의 발상에 그가 도달하게 된 배경에 영국 및 유럽 대륙의 선배들로부터 어떤 영감들을 물려받았는지, 공리주의가 그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해서 법철학과 사법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경제적 문제들에 관해 애덤 스미스에게서 받은 영향을 그가 어떻게 나름대로 응용해서 당대 영국에서 다각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개혁운동의 갈래들 중에서 어떤 위치를 점했는지 등을 해명한다. 제2권에서는 1789년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까지 벤담의 중장년기이자 유럽이 격렬한 사회변동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에, 버크, 페인, 고드윈, 맬서스 등 정치와 경제에 관해 활발히 주장을 펼친 동시대 개혁가들과 벤담이 주고받은 영향, 그리고 특히 제임스 밀을 통해서 벤담주의가 맬서스의 경고와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철학적 급진주의가 탄생하는 사연을 살펴본다. 그리고 제3권에서는 벤담의 노년기를 배경으로, 벤담과 그 추종자들이 꿈꿨던 사회의 기본 질서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에 관한 그들의 이념이 정형화되는 바탕에 인간의 지식과 행동에 관한 어떤 견해들이 있었는지, 다시 말해 그들의 인식론과 심리학이 어떠했는지를 탐구한다.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리주의는, 진지한 논의의 주제로 다뤄지기도 전에 이것이 매우 비인간적이며 무례한 사고방식인 것처럼, 정체가 불분명하지만 굳이 캐내서 확인할 가치조차 없이 불쾌한 대상인 것처럼 배척되는 경향이 있다. 영어권이나 유럽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특히 좌파 또는 급진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없지 않은데,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조금 더 심해 보인다. 이런 반응은 문제 되는 주장의 취지를 엉뚱하게 오해하고도 오해인 줄을 모른 채 마냥 배척으로 일관하는 태도, 다시 말해 이치를 파고 들어가는 방향의 관심을 추구하기보다는 피상적인 인상에 좌우되는 말초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태도에서 일반적으로 비롯되는 부당한 반응의 한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는 대략 네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이 교도소 체제에 그치지 않고 마치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중앙에서 감시하는 사회체제를 시사한다는 듯이 과장해 놓은 투사(投射, projection)가 있다. 푸코의 지적에는,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자면, 조직의 고도화가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도 괜찮겠느냐는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벤담이 이를 간과한 것은 사실이나, 조직화의 문제는 벤담 개인보다는 근대 문명 전체의 본질적 성격에서 비롯하는 것이고, 생산성과 효율성 및 궁극적으로는 인류가 자연을 대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원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계속 커질 수밖에 없는 문제다. 더구나, 벤담은 파놉티콘 말고도 수많은 주장과 제안들을 내놓았다.

둘째, 존 롤스가 『사회정의론』에서 그리고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치 공리주의가 도덕을 무시하고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듯이 그려놓은 이분법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이야말로 벤담이 공리주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벤담은 도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도덕의 명령이란 이익들을 균형에 맞추면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결과”라고 봤다. 이로써 벤담이 도덕/이익 이분법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는지를 논의할 여지는 많지만, 그러한 논의의 필요 자체를 감지하지 못한 채,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이분법에 그를 끼워 맞춰 재단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부당하다.

셋째, 공리주의가 사회주의를 배척하고 자본주의를 편든다는 생각이 있다. 제레미 벤담이 로크와 섀프츠베리와 허치슨과 흄과 애덤 스미스 등 영국인 선배들을 깊게 공부했고, 특히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벤담은 선배들을 추종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비판도 했다. 공리를 중시함으로써 사회를 개혁한다는 발상은 토머스 스펜스, 윌리엄 고드윈, 로버트 오웬, 토머스 호지스킨 등 사회주의 사상의 선구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났고, 실제로 이들은 벤담 및 벤담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활동했다. 특히 철학적 급진주의는 맬서스의 비관론에서 큰 영향과 많은 영감을 받아 탄생한 사회개혁 이념으로서, 자본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게 대항세력을 정부의 정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예컨대 미제스는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나간 데에는 마르크스나 엥겔스보다도 존 스튜어트 밀에게 책임이 있다고 공격할 정도였다.

넷째,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발상을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권력의 행사를 공리주의와 혼동하는 풍조가 있다. 한국 사회는 적어도 지난 200년 동안 엄청난 격변을 겪었고, 격변의 와중에 이치를 무력이 짓밟는 처사가 만연했다. 이에 덧붙여 지식인들 사이에는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발상을 마키아벨리주의 또는 공리주의로 혼동하는 풍조가 생겼다. 공리주의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기 전에 공리주의적 발상을 전개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마키아벨리를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도 벤담도 대를 위해 소의 희생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인정한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언제가 필요한 경우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잊지 않았다.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은, 다수에게 돌아갈 이익이 소수가 겪어야 할 희생보다 커야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전체에게 돌아갈 이익의 감소분이 (또는 전체가 겪어야 할 손해의 증가분이) 그렇게 했을 때 소수가 겪어야 할 희생보다 클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소수를 희생시켜서 다수가 이익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례는 무한히 많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정당화는 자체로 대단히 까다로운 과제일 뿐만 아니라, 벤담은 살인자에 대한 사형조차도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하다고 봤을 정도로 “소수의 희생”에 대한 정당화 논거를 아주 까다롭게 요구했던 인물이다. 아무 때나 대를 위한다는 핑계로 소의 희생을 강요하는 논법은 권력자의 편의에 굴종하는 어법에 불과한 반면에, 벤담은 권력자의 편의를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통제할 수 있는 어법으로서 공리의 어법을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필요”의 어법을) 개발한 것이다.

벤담의 사상을 진지하게 살펴볼 가치는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된 그의 사상들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인지될 수 있다. 알레비는 나름의 연구와 사색을 통해 일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서 이 책을 통해 펼쳐 놓았다. 알레비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실질적으로 접속하려면 피상적인 수준의 과장과 왜곡과 투사와 오해 때문에 생성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어쩌면 굳어져 버린, 선입견을 먼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 책에서 논의되는 철학적 급진주의의 풍성한 내용을 음미하면서, 거기에 어떤 이치가 있는지, 또는 어떤 과장이나 모순이나 허점이 있는지를 찬찬히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의 내용을 한국인으로서 꼼꼼히 살펴볼 만한 정황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벤담이 공리주의의 발상에 설득된 데에는, 다른 사람들은 접어두더라도, 이탈리아인 베카리아와 프랑스인 엘베시우스의 영향이 있었지만, 그가 활약한 이후로 공리주의는 영국 사회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만큼 공리주의는 보기에 따라 전형적으로 영국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도덕에 관한 영국 특유의 사상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사고방식을 프랑스인 알레비가 연구한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알레비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역사의 물결들이 아무도 거역할 수 없도록 주류의 자리를 차지한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1789년의 혁명 이래 그때까지 격렬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던 프랑스에 비해, 영국에서는 어떻게 시대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며 점진적인 수준에서 관리될 수 있었는지를 궁금하게 여겼다. 공리주의 또는 철학적 급진주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비록 알레비가 명시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려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후보 중 하나는 된다. 지난 70년 내지 150년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대단히 폭력적인 격변을 겪은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충분히 적실성이 있는 논제다.

도덕적 판단에서 공리주의가 하나의 일반적 지침으로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묻는다면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도덕의 개념과 일반적 지침이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공리주의가 아닌 어떤 다른 도덕이론이라고 해서 올바른 판단을 위한 일반적 지침을 제공하지는 못 한다. 반면에 일반적인 지침을 구하지 않고 특별한 경우에 쓸 수 있는 잣대를 구하는 것이라면, 공리주의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판단의 기준으로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경제학, 경영학, 정책학, 행정학, 합리적 선택 이론 등에서 비용효과분석이라는 형태로 공리계산법은 현대인에게 사유의 기본 형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발상의 전환이 어떤 정치?경제?사회적 배경에서 어떤 지적인 성찰들을 거쳐서 어떻게 형체를 갖추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알레비의 요약은 훌륭한 안내가 된다. 아울러 벤담의 시대에 영국과 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정치?경제?사회의 문제의 해결 내지 개선을 위해서 지성과 정성을 바쳤는지, 그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조차도 적어도 공론장에서 발언할 때에는 개인적 감정이나 욕구를 표출하기보다는 이치에 맞는 말을 따라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등도 철학적 급진주의와 관련된 다방면의 논의들을 통해서 엿볼 수가 있다.

이 책을 번역한다는 구상은 20여 년 전에,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 중이던 양승태 교수의 언급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정치사상학회의 회원 몇 명이 모여 대화하던 도중에 양 교수께서는 한국어 번역이 필요한 문헌 몇 가지를 얘기했는데, 그 중에 이 책이 뇌리에 남았다. 다만 프랑스어라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에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 사업의 일환으로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를 번역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 밀이 인용한 상당히 많은 분량의 프랑스어 문장들과 씨름해야 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우고, 대학교 1학년 때 프랑스어 교양 강좌를 수강한 이후, 아주 가끔 필요할 때 사전을 찾아가면서 문헌 몇 개를 읽은 것이 전부였다. 다만 고등학교에서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가르쳐 주신 김용년 선생님 덕분에 프랑스어 문법의 기초 사항들은 기억의 한 구석에 줄곧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강원대학교 김남연 교수 부부에게 틈만 나면 물어볼 수가 있어서, 그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2015년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한국연구재단 명저번역 사업의 지원을 받은 덕택이었다. 사전을 찾아가면서 프랑스어 문장을 천천히 읽어낼 수는 있었지만, 번역 이외에 다른 문제가 또 생겼다. 19세기 출판계의 관행에 따라, 알레비의 인용과 출전에 적지 않은 불확실성 내지 부정확성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한국에 없는 책들인지라 난감했는데, 다행히도 다양한 학술자료 웹사이트에서 대부분의 문헌들을 찾아서 대조할 수가 있었다. 기술 문명의 놀라운 업적이고 현대 인류에게 아직 희망의 불꽃이 다 꺼지지는 않았다는 증좌로 내세울 수 있을 만큼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이에 덧붙여, 메리 모리스의 영역본도 이 번역본을 내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영역본 덕택으로 프랑스어 문장들의 뜻을 빨리 파악할 수 있었고, 때로 출현하는 모리스의 오역이나 오기를 통해 원문의 뜻을 더욱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알레비가 인용하는 문장들을 정확하게 추적하는 데 들어갈 시간을 아주 많이 절약할 수가 있었다. 이 책에서 인용되는 문장들은 대부분이 영어 문헌에서 따온 것인데, 알레비가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인용한 영어 문장들을 모리스는 원전을 찾아 원저자가 쓴 영어 문장들로 복구해서 나타낸 덕택으로, 내가 새삼스럽게 영어 원문들을 찾아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아울러, 전북대학교에서 2018년에 연구년을 허락해 준 덕에 번역문 초고를 완성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목포대학교의 하상복 교수는 정리되지 못한 원고를 검토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유익한 논평을 달아 회신해줬다. 나아가, 여기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고, 그 분들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 책이 부족하나마 은혜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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