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
장욱진이 일제의 억압, 해방공간의 혼란, 6?25의 참상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 경제적 격변을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토속적인 소재에 집착했다는 건 그에게 그림이 현실도피의 수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 피난시절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또 다른 도피수단인 폭주에 빠진 것도 그러한 해석을 부추긴다. 따라서 그의 모습에서 보들레르가 묘사한 낭만주의 예술가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라는 그의 말이 시사하듯, 그의 현실도피의 목적은 역설적이게도 현실긍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먼저 집안에서 모기장을 치고 누워있는 인물을 묘사한 ‘모기장’(1959)에서 모기장은 측면, 인물은 윗면에서 포착된 모습이고, 집의 벽은 제거돼어 내부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길을 걷는 가족과 가축을 묘사한 ‘가로수’(1978)에서는 집들이 나무 위에 위치해 공간적 관계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이같은 다시점, 투시기법 그리고 비논리적 공간관계 등은 아동미술과 원시미술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아동과 원시인의 소박하고 순수한 시각과 표현방식을 통해 세속과 문명을 초탈한 이상향을 그리려는 장욱진의 의지를 드러낸다.
장욱진은 해방 직후에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고분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박물관 소장품 연구를 통해 원시와 고대의 미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어린이만이 가진 그 깨끗함과 순수무구함, 그리고 원시인에서 볼 수 있는 주정적인 미감”에 동경을 품고 있었다. 치밀한 밀도와 세련된 조형미와 같은 현대적 조형방식 속에 비논리적인 시점, 공간, 스케일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1965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글에서 그는 자연과 일체가 된 자신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한편 집안에 불교신자가 많았고 非空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던 장욱진은 불교적 주제를 통해서도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한 욕망을 표현했다. 불교의 가르침 석가의 생애를 그린 ‘팔상도’(1976)나 아내의 모습을 불상의 모습으로 그린 ‘진진묘’(1970)와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정무정 / 덕성여대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