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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 국가보안법 앞에 중립은 없다
[교수논평] 국가보안법 앞에 중립은 없다
  • 정상호 한양대
  • 승인 2004.11.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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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호 /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정치학 ©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이 한창 뜨겁다. 시청 앞 광장을 경계선으로 폐지나 사수를 주장하는 두 세력의 격렬한 구호를 보면서 참으로 기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의 시간대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공시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 기이한 점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고 현재의 삶 속에서도 부조리한 이 법의 존재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별로 불편하게 느끼고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이 정치권력의 의지에 따라 자의적으로 악용돼 왔으며, 여전히 남용 가능성이 큰 대표적인 반인권 악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들이 분단국가의 예외적 특수 상황을 내세워 여전히 국보법이 필요하다는 존치 주장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비합법 조직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지하실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하지 않았던 선량한 시민들의 다수 견해는 강력 폐지나 적극 존속이 아니라 무관심인 것으로 보인다.

 

대중의 무관심을 초래한 일차적 원인은 이 문제가 일반 국민의 이해와 무관한 정치적 사안으로 인식하게끔 유도한 보수 언론의 의제 설정 능력에 근거한다. 그렇지만 그 근저에는 문명사회의 대표적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현실의 불가피한 제도로 수용하게 만드는 한국사회의 전근대적, 비민주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비정상적 존재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는 전도된 상황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공고화도, 절차적 민주주의의 온존한 실현도 아직 멀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여주는 확고한 증거인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마지막 의아함은, 그렇게도 많은 교수들이 인권과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는 다원주의 모델 국가인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학이나 교수 사회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2003년 현재 한국은 미국 유학생을 구성하고 있는 국가 순위에서 중국과 인도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외국에서 취득한 박사학위의 70% 정도는 미국 대학이 수여한 것이다.

 

오늘 국가보안법이 유린하고 있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는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연구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권리이다. 국가보안법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연구자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여 왔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반국가단체의 법적 규정이 반체제 활동은 물론 반정부 활동에까지 확대 적용되면서 진보적 학술 영역에의 접근을 사전에 봉쇄하는 효과를 낳았다. 사회주의 이념, 계급 정당, 혁신 세력에 대한 연구는 반공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서술만이 허용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북한 연구가 중립적 태도의 견지가 가능한 대북 정책 연구에 치중하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는 사상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상상의 자유이다. 국가보안법이 강제한 자기검열 효과는 사상의 정치적, 집단적 실현 의지의 봉쇄 이전에 주체적 상상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어 놓았다. 한국의 학술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위기의 심연에 국가보안법이 야기한 저열한 ‘국민상상력지수’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는 학문과 현실의 동 떨어진 이중 구조 문제이다. 마치 이공계 분야에서 기업이 요구하는 정보와 인력을 대학이 전달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시민적 소양과 비판적 지식 역시 대학은 전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권으로서의 재산권 침해를 앞세워 사립학교법이나 언론관계법 개정을 반대하는 사학과 언론이 기본권의 또 다른 축인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목숨 걸고 지켜내겠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철 지난 코미디를 보는 듯 하다. 민주주의는 국가보안법이 그토록 지켜내고자 하는 금기, 특권, 차별의 최소화를 지향한다. 정치적 중립성을 가장하여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을 수동적으로 방관하여 온 대학 공동체나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의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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