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3:15 (토)
‘흙수저’ 청년의 일터, 불안이 불안을 재생산하는 착취의 뉴노멀
‘흙수저’ 청년의 일터, 불안이 불안을 재생산하는 착취의 뉴노멀
  • 박강수
  • 승인 2021.05.19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의 논문_온라인 커뮤니티 통해 본 청년 프리카리아트의 풍경, 「청년 불안정 노동자의 자본주의 미시세계」

“(폭언하는 편의점 손님에게) 유니폼 패대기 치고 내가 유니폼 없이도 여기 일하는 사람 같냐고 되물었더니 입을 쳐 닫고 X같은 눈으로 째리고만 있더라. 힘든 일 하는 편붕이, 서비스직 종사자들아, 니들 잘못 아니다. 돈 없는 것도, 돈을 바라게 된 삶도 니들 잘못 아니라고.”

디시인사이드 편의점갤러리(이하 편갤)에 올라온 어느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말이다. ‘편붕이’란 편갤 이용자를 이르는 커뮤니티 은어다. 이들은 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자들이다. 격한 어조로 동료 편붕이들을 위무하는 위 편붕이의 짧은 문장 속에 청년 불안정 노동자의 내밀한 표정이 윤색 없이 새겨져 있다.

 

디시 개념글에 박제된 노동체험 서사 읽기

 

「청년 불안정 노동자의 자본주의 미시세계: 물류센터와 편의점의 노동체험 서사에 대한 질적 내용분석」(한국사회정책, 2021.3)은 그 표정들을 긁어 모아 청년 불안정 노동 현장의 역학 구조를 읽어낸 논문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과)와 김우식 전국금속노동조합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이 함께 연구했다. 이들은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세 달간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아르바이트갤러리(이하 알갤)와 편의점갤러리에 올라온 ‘개념글(갤러리에서 이용자 다수의 추천을 받은 글)’ 1천827개를 선별, 분류, 분석했다.

 

커뮤니티 게시글을 소스로 차용한 이유에 대해 신 교수는 “통계자료, 설문조사, 심층면접 등을 활용한 기존 연구의 방법들은 모두 인위적 조사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소통 상황’에서 표현되는 삶과 노동의 현실, 내면을 포착하기 어렵다”면서 “청년 노동자들이 노동현장의 경험과 문제들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조사한 뒤 가장 이용자가 많고 연구 주제에도 부합하는 두 곳을 선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예가 된 기분, 꾹 참고 내일도 나간다”

 

그렇게 낙점된 두 커뮤니티가 표상하는 노동현장은 둘이다. 물류센터(알갤)와 편의점(편갤). 저자들은 “두 사례 모두 숙련도가 낮아 대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고용관계에서 갑의 지배력을 높인다”며 “고도의 불안정성을 공통점으로 갖는다”고 봤다. 또한 알갤과 편갤 둘 다 2030 청년층 이용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두 곳 모두 80%를 넘는다. ‘청년 미숙련 불안정 노동’의 대표 현장들이다.

청년노동자들의 진술은 진솔하고 살벌하며 살벌한 표현의 이면에서는 절망을 생산하는 착취 구조의 흔적이 읽힌다. “화장실 가려는데 이름 적고 시간 체크까지 하더라. 진심 노예된 기분 개X같았지만 내일도 나간다”라는 말에는 노동자의 이동과 시간마저 통제하고 억압하는 감시 체계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일용직 신분 탓에 군말 없이 견뎌야 하는 물류창고 노동자의 비애가 깃들어 있다. “일 못한다고 욕먹고 서러움과 분노에 추노함. 새벽 내내 떨면서 첫차 기다림. 36세에 (물류창고) 추노하면 어떤 인생이냐?”는 말에서는 정나미가 다 떨어진 일터에 대한 증오와 계속되는 소모품 취급에 지쳐 스스로 내재화한 자기혐오가 느껴진다.

신 교수는 “고용, 노동, 복지 등 여러 측면의 불안정성이 단순한 상태를 넘어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연구의 의의를 짚었다. “낮은 소득, 낮은 숙련도, 불안정한 고용, 조직화하기 어려운 환경 등 조건은 청년노동자들이 고용주와 관계에서 극단적인 권력불평등 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의지에 반하여 통제를 강화하고 착취를 극대화해 이윤을 창출하고자 하지만 노동자는 ‘잘리지 않기 위해’ 과도한 노동강도, 위험한 작업환경, 비인격적 대우 등에 항의하지 못한다”. 신 교수의 부연이다.

 

숨기고 싶은 ‘내 일’, 하루빨리 탈출해야

 

김우식 연구위원은 “불안정 노동자는 새로운 계급보다는 특정한 사회집단에 가깝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인 자본-노동의 거시적인 계급 관계보다는 현장의 사람들과 부딪히며 구성되는 미시적 관계망에 자리한다.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억압적 조직 체계를 설계한 회사가 아니라 그 얼굴마담인 관리자를 적대하고, 청년 남성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더 힘든 일을 하는데도 같은 돈을 받는다는 생각에 작업장의 노인, 여성 동료들을 혐오한다. 편의점 노동자들은 ‘온정주의적’ 변명으로 일관하며 정당한 임금을 떼먹는 점주와 ‘갑질’과 ‘진상짓’을 일삼는 ‘손놈’을 증오한다. 반면, 저자들의 지적처럼 “쿠팡 같은 거대기업 경영진, 편의점 프렌차이즈 본사는 이 모든 갈등관계에 등장하지 않는다”.

 

2019년 추석을 앞두고 물류 분류 작업이 한창인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물류센터의 모습. 사진=연합
2019년 추석을 앞두고 물류 분류 작업이 한창인 서울 광진구 동서울우편물류센터의 모습. 사진=연합

다층적인 불안정성은 노동자들의 일과 삶에 대한 의식을 좀먹는다. 신 교수는 “연구에 등장한 청년 불안정 노동자들은 일과 일자리, 미래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태도, 자기 자신 및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자기혐오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의 노동을 오직 생계비를 위해서 하는,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며, 하루 빨리 돈을 벌어 탈출하고자 한다. 이러한 심리적 태도에는 “사회에서 경멸이나 동정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 노동현장에서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한 경험, 학력이나 직업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대한 지식” 등이 영향을 미쳤다. 김 연구위원은 “한국 청년에게는 긍정적 삶의 롤 모델도 없고 수저론처럼 부모찬스가 만연한 사회에서 도전적인 미래 계획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암울한 인식은 불안정 노동을 하는 청년층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불안정한 노동이 불안정한 자의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 청년들의 대항권력 ‘서포트’

 

그럼에도 저자들은 같은 청년노동자들의 증언록에서 ‘대항권력 형성’의 가능성을 짚어낸다. 이들은 “대기업 본사 앞에서 항의집회를 하지는 않”지만 물류창고에서는 서로 “비가시적 태업의 기술을 공유”하고 편의점에서는 “퇴직 후 사장을 고발해 정당한 임금을 돌려받거나 소비자의 폭언과 폭행에 법 집행을 요구”한다. 청년들은 “쿠팡의 대리인인 관리자” 몰래 사보타주를 벌이고 “유니세프 후원하면서 주휴수당은 떼먹는 사장님”을 고용노동청에 신고해 임금을 받아낸다. ‘자본주의 미시세계’의 계급투쟁인 셈이다.

이때 우군은 ‘법과 제도, 국가의 존재’다. 저자들은 “고용노동청, 국가인권위원회 등 기관, 최저임금법, 산업안전보건법, 주휴수당제 등 보호 법제의 존재는 이들이 사용자나 소비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자원”이라고 썼다. 신 교수는 “청년 불안정 노동자들을 위한 공적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은 단지 물질적 복리를 증대하는 것뿐 아니라, 노동현장에서의 권익 주장과 협상력을 가능케 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