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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지성주의' 언론의 먹이감…"비판적 감수성 절실"
순진한 '지성주의' 언론의 먹이감…"비판적 감수성 절실"
  • 전규찬 한예종
  • 승인 2004.11.05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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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언론의 노회한 정치담화에 이용되는 교수들

"대내외적 난제들 앞에서 그것들을 타개해 나가는데 절대 필요한 이성적 대화의 장이 없다." 지난 달 29일,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가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주최한 대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이 교수는 '지성의 위기와 그 역사적 배경'이라는 논문에서 '반지성주의·반엘리트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이 교수의 발언은 상고출신 대통령의 반지성주의와 반엘리트주의로 왜곡·부풀려져 일간지 지면을 크게 장식했다. 이 교수가 지적했듯이, "지성의 권위 추락의 기본 원인은 지식인들 스스로가 지성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를 개탄하려던 지성인들의 시도가 언론에 의해 다시 한번 지성의 권위를 추락시킨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일이다. <편집자주>

 

신문이 교수들을 키워주고 교수들은 신문을 지켜주는 말 같지도 않은 쇼가 최근 너무나 자주 벌어진다. 일부 연구자들이 지난 대통령 탄핵에 관한 텔레비전 보도가 ‘편파적’이고 ‘불공정’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을 때다. 많은 언론학자들이 절차적, 방법론적, 이론적 측면에서 중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분명 경청할만한 일리 있는 지적이었고 타당한 비판이었다. 토론과 논쟁이 필요했다. 그때 논의를 한방에 잠 재워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지성’이라는 거대언어였다. 수구 신문들은, 그리고 그 지면에 얼굴 내민 원로들은 동료와 후배 학자들의 문제제기를 ‘지성’에 대한 ‘야만’의 헐뜯기로 매도해버렸다. 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다. 결국 싸구려로 마구 팔리는 ‘지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깊은 회의와 환멸, 배신감만 남는다.

한물간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원로’라 부르는 것과 똑같이 교수들이 ‘지성’이라고 자칭하고 나서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민망함. ‘지성’을 앞세우는 신문치고 전혀 지성적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수구 신문에 얼굴 내밀고 ‘지성주의’를 외치는 이들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이들의 담론을 앞세워 자기 살길을 도모하는 수구 신문들의 기회주의가 밉지만, 이들 신문에 의해 놀아나는 한국 교수사회의 허약함도 보기 안타깝다. 교수들 간 자율적 언론조차 내버려두지 않는 수구 신문들의 집착증적 애정.

지난주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토론회를 개최한 모양이다. 서울대라서 그토록 뉴스 가치가 높은 건가. 일개 대학의 연례행사가 ‘동아일보’ 일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기사는 사회면으로 가서 더욱 키워지며, “참석자들의 진지한 표정”을 담은 사진이 발제자들의 상세한 이력과 더불어 보너스로 박힌다. “반엘리트-반지성주의, 노정부 들어 두드러져, 이성적 대화의 장 상실”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위에는 발제자들의 얼굴까지 친절하게 사진으로 찍혀있다. “새 정부 출범 이래 가장 두드러진 사회적 변화가 반엘리트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표출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는 주제발표가 기사 머리말로 강조된다. 발표의 전체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반지성주의’에 관한 발언이, ‘상고출신’ 대통령에 대한 질의가 사회적으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수구 이념 확장의 목적으로 전유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을 비롯한 1백여명의 서울대 내외 교수들이 모인 이번 토론회에서는 현 시기 '지성의 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러나 위기의 원인을 역사적 배경에서 파악한 이인호 교수의 발표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 김조영혜 기자
대학사회 늘 있는 일을 과장해 말아먹는 ‘동아일보’의 이념 전략이 노골적으로 작동한다. “반엘리트주의, 반지성주의”라는 제목의 사설에 가면 신문이 왜 이 행사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는지, 그 속뜻이 잘 드러난다. “맹목적 평등”을 위해 “능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지는 진정한 엘리트주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지성주의’ 논의를 사학법 개정 반대 논리와 절묘히 연결시킨다. 해프닝으로 넘기기에는 대가가 너무나 큰 ‘합의의 제조’ 공작이다.

왜냐하면 실제 국민 다수는 사학법 개정을 찬성하고 있다는 게 여론조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다중은 사학의 개혁이 이 땅에 지성주의를 제대로 꽃피우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수구신문은 사학법을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악법’으로 선전한다. 여론의 명백한 배신이자 모독이다. 불행히도 교수들의 ‘대학자율’과 ‘지성주의’ 이야기가 신문의 사악한 거짓말을 위해 마구잡이로 동원된다.

유사한 수법이 같은 날 같은 신문에서 발견된다. 고려대 어떤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자신의 학교에서 발표자 1인의 작은 세미나를 열었다. 신문은 이를 한국언론학회 세미나로 키운다. 그러나 공익을 위해서 신문 시장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은 정당하다는 발제 내용이 자기 입맛에 안 맞았던지 ‘동아일보’는 기사를 엉뚱하게 반대 토론자들의 목소리로 채운다. 제목도 “경영진 압력 막겠다고 국가 개입 땐 언론이 정치권력-노조에 휘둘릴 뿐”으로 뽑는다. 발제자를 포함한 네 명의 사진 밑에는 “언론계 최근 진통 본질은 정치 문제”, “외부의 압력이 한국 언론 위협,” “신문법안 강행 땐 언론자유 무너져”라는 우호적 의견들이 단연 우세다. 발제자에 대한 무례는 차치하고, 언론개혁에 찬성하는 시민 다수의 생각과 한참 어긋난 ‘막가파식’ 보도다. 앞선 첫 번째, 두 번째 사례와 구분되는 또 다른 교수담론 포획의 행태다.

제멋대로 부풀리고, 제 입맛대로 죽인다. 오보도 개의치 않는다. 보수이념에 공감하는 교수 세 사람을 불러내 언론개혁에 관해 ‘좌담’토록 하는 별스런 흥행이 ‘조선일보’에서 계속된다. 언론개혁법안 봉쇄를 위해서라면 어떤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유’와 ‘자율’, ‘지성’을 말해줄 말꾼들이 필요하다. 촘스키가 말한, 권력이 원하는 바를 대신 말해줄 언론학계와 그 바깥의 ‘전문가’다. 말하는 자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생존에 필요한 교수 담론이라면 이를 적극 포섭하라! 지면을 할애하고, 이름을 띄워주며, 의사를 왜곡하고 또 조작하라!

교수사회가 이런 긴급한 상황에 대해 현실감을 키워야 한다. 수구 신문사들의 노회한 담화정치에 비판적 감수성을 키우고, 이들 권력의 교수사회 침범에 자각심을 높여야 한다. 물론 자의에 따라 참여하고 있는 다수의 자발적 협력자들은 제외하고서다. 지배언론과 근친관계를 맺는 것은 교수사회나 교수 개인의 지성적 활동에 치명적으로 위해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불행하다. 발언의 가치를 높이자. 요란한 선전 무대에 광대로 불려나가지 않으려면 진짜 지성의 안목을 바짝 높이는 게 좋다. 어설프고 순진한 ‘지성주의’ 이야기는 현 상황에서 수구신문에 잡아먹히기 딱 알맞은 먹이감일 뿐이다.

전규찬/한예종·문화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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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진 2004-11-08 11:18:27
오랜만에 시원하고 명쾌한 글을 접하게 되었네요.
많은 분들이 함께 느끼는 글이 되길.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