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익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 서울대 의사학 © |
조선시대말 이 땅에 근대교육제도가 도입됐을 때 당대의 선각자들이 근대적 공립학교 개설을 정부에 촉구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립학교 설립에 앞장서고 민중들이 열렬히 호응했던 것은 교육입국론도 작용했지만 근대교육이 갖는 공공성 때문이었다. 교육이 특권적인 것이었다면 결코 수많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일제가 조선인들이 세운 학교들을 폐쇄하고 강탈하고 억압했던 까닭은 조선인 학교라는 점도 있었지만, 역시 그 공공성을 두려워해서였다. 수난의 근대교육 1백년 역사지만, 우리는 초기부터 자랑스러운 사학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私學이든 官學이든 교육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공공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일제시대에서 해방됐을 때 이 땅에는 다시 공공적인 사학 설립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그러한 열기와 진정성은 50년에 이르는 폭압적인 국가권력, 그리고 권력과 밀착한 學商輩들에 의해 유린, 왜곡돼 적지 않은 사학들이 학원족벌의 사유물로 전락하게 됐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학교는 교육의 장이다. 교사와 교수 등 교원은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 또 교원은 가르치면서 배우기도 한다.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가. 슬기로운생활, 바른생활부터 문학, 경제학, 생물학 등 교과목을 들자면 한이 없다. 많은 것을 가르치고 배우지만, 민주사회에서 교육은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요컨대 학교는 민주주의의 훈련장이다.
학교와 교육은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국가권력이 과거보다 민주화된 덕분에 학교와 교육에 대한 국가의 탄압과 간섭은 많이 줄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국가로부터는 자유롭지만 학교가 학원족벌에 의해 전횡적으로 지배된다면, 그 역시 공공의 교육장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학교 현실은 대부분 민주주의 배움터와 공공교육장이라는 본연의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가장 민주적이고 공공성이 충만해야 할 학교가 어디보다도 비민주적이고 특권적이다. 특히 사립학교는 교원과 직원, 학생과 학부모 등 학교구성원들과 사립학교법인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법인 이사장 한 개인이나 몇몇의 사유물과 상속물(!)로 전락해 있다. 그렇기에 빙산의 일각이지만 단국대, 상문고등학교 등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부패비리가 발생하고 교원과 직원의 인권이 유린되고 교육이 내팽겨쳐진다.
민주사회에서 학교와 교육의 생명은 민주성과 공공성이다. 어느 조직이든 민주와 공공의 원칙을 잃었을 때 부패비리와 퇴보는 필연적이거니와, 설령 아직은 부패하지 않았더라도 공공성의 원리에 따라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면 결코 민주사회의 학교라고 할 수 없다. 비리사학 척결을 넘어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 사립학교법을 개정해야 하는 것이다. 영리기업들에서조차 당연시되는 공익이사제 도입, 학교(장)에게 교직원 임면권을 되돌려주는 것, 교직원회의 법정기구화 등은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부패비리와 무관하다면, 사립학교에 관여하는 이유가 진정 ‘교육’이라면, 학교를 사적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누구든 이러한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할 리가 없고, 법 개정이 되면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할 까닭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