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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색인이 백인을 차별해도 인종주의자일까
유색인이 백인을 차별해도 인종주의자일까
  • 박강수
  • 승인 2021.05.14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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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책_『백인의 취약성』
로빈 디앤젤로 지음|이재만 옮김|책과함께|288쪽

 

백인은 정치적 표준이자 문화적 보편

인종주의 이해하려면 '백인성'부터 돌아봐야

 

백인 저자가 백인의 인종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인종주의를 탐구한 이 책은 2018년에 나왔다. 2년 뒤인 2020년 5월 25일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했다. 그 사이 내내 『백인의 취약성』은 베스트셀러였고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본격화된 이후에는 더 많이 읽혔다. 이 무렵 저자 로빈 디앤젤로는 NBC 투나잇쇼에 비대면으로 출연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야(I’m not a racist).’ 백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인종주의는 사회적 결과물이다. 사회는 인종주의라는 기반 위에 있고 우리는 모두 인종주의를 흡수한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스스로를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는 인종주의자인가’가 아니라 ‘인종주의는 나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강제했나’로.”

 

“인종주의는 우리 문화에 깊게 뿌리내린 다층 체제이고, 우리 모두 인종주의 체제 안에서 사회화된다. 인종주의를 피할 수는 없다.”(244쪽) 이 전제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오직 백인만이 ‘인종주의자’일 수 있다는 것. 인종을 차별함으로써 구축되고 작동하는 사회에서 백인은 인종주의 체제의 주모자가 된다. 유색인이 백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차별할 수는 있지만 이 편견과 차별을 구조(인종주의)로 바꿀 수 있는 권력은 오직 백인에게만 있다. 구조의 가담자 및 책임자로서 인종주의자는 백인뿐이다.

이를 재차 입증하는 일은 입 아프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명이 모두 백인이고 연방의회의 90%, 주지사의 96%, 방송국 책임자의 93%, 역대 흥행 수입 상위 영화 100편의 감독 중 95%, 교사의 82%, 전임교수의 84%가 전부 백인이다. 백인은 정치적 표준이고 문화적 보편이다. 헤밍웨이나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인류 보편의 목소리로 읽히지만 토니 모리슨이나 제임스 볼드윈은 ‘흑인’의 목소리로 읽힌다. 백인은 살아가면서 ‘백인성’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할 필요가 없다. 몰라도 되는 것, 가장 강력한 특권이다.

 

‘'멘붕’하는 인종주의의 기득권자들

 

특권은 동시에 아킬레스건이다. 백인성 자체가 인종주의 시스템의 외피이다 보니 백인의 인종 정체성을 자각하는 과정은 자연스레 자신이 인종주의자임을 깨닫거나 지적당하는 일이 된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백인들은 곧잘 ‘멘붕(meltdown)’에 빠진다.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이다. 인종 정의(Justice) 트레이너 겸 상담사로 20년을 지낸 저자가 필드에서 수없이 목격하고 마주한 반응들이다. ‘유색인 친구가 있는 나는 결단코 인종주의자가 아니야’, ‘인종주의자는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미치광이나 도널드 트럼프한테나 쓰는 말이지’라고 믿어온 많은 백인들이 인종주의에 온갖 비도덕적 함의(인종주의자는 나쁜 사람)를 몰아넣은 뒤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는다.

두 번째 시사점이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인종주의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과 상관이 없으며 인종주의를 지적 받고 개선하는 과정에 죄책감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사회화를 피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사회에 내던져졌다는 점은 내 잘못이 아니다. 다만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고 행동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죄보다는 책임으로 접근해야 풀린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정체성 정치 실용서가 된다. 저자는 절박하게 강조한다. “인종주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색인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고 있다. 인종주의를 저지하는 것이 나의 감정이나 자아상보다 중요하다.”

 

로빈 디앤젤로는 날이 곤두선 정치적 올바름의 드높은 이상에 방향만 살짝 바꿔 현실을 굽어보도록 했다. 인종주의는 비난의 도구가 아니라 현실의 조건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일상 속 변화를 도모하는 움직임이 큰 줄기를 이룰 때라야 비로소 세계는 조금씩 바뀔 것이다. 한국에서는 최근 몇 달간 아시아계 미국인을 때리고 모욕하는 흑인의 모습을 부각시켜 보여주는 보도들이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스탑아시안헤이트(Stop Asian Hate)’ 집회에 함께하는 흑인이 더 많다는 점이나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는 그대로 모든 소수인종의 자산이기도 하다는 점은 잘 얘기되지 않았다. 인종주의를 휘두르며 싸우기보다는 인종주의와 싸우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게도 필요해 보인다.

 

박강수 기자 pp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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