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3:10 (금)
낭만주의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낭만주의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 정민기
  • 승인 2021.05.07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낭만주의의 뿌리 | 이사야 벌린 지음 |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304쪽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은 자유 개념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세분화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벌린의 업적중에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에 관한 연구다. 

벌린은 옥스퍼드대 교수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죽기 전까지 약 20년간 낭만주의에 관한 막대한 자료를 축적해왔다. 하지만 중간에 연구 방향을 수정하면서 벌린은 책을 한 문장도 진행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벌린이 죽기전에 남긴 낭만주의 연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벌린은 1965년 미국 워싱턴 D.C 국립미술관에서 7회에 걸쳐 낭만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녹취록을 출간하자는 주변의 권유에 벌린은 “제대로 된 책을 내겠다”며 거부했지만, 말년에 책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꼈는지 사후 출간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벌린이 죽은 뒤에 제자들은 녹취록을 편집해서 책으로 출간했고, 드디어 올해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이 책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낭만주의는 단순히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이 아니라 “우리 시대 서구 의식의 가장 커다란 변혁”이다. 둘째, 파멸로 치닫은 낭만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칸트의 경건주의적인 신조에서 시작됐다.

2천 년 이어진 서양 철학을 뒤집다

낭만주의는 지식이나 과학의 진보에 우선적 관심을 두지 않고 원초적인 삶의 감각을 강조한다. 사회로부터 주어진 목표나 이상이 아닌 진정성을 갖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이상을 추구한다. 통제 불능의 급류에 떠다니기보다 차라리 자기 파별과 자살을 선택한다. 아름다움, 위대성, 숭고, 지혜의 객관적 이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자신이 전념하고자 하는 가치를 추구한다.

벌린이 강조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낭만주의는 서구 사상사에서 지난 2천년 동안 견고하게 군림했던 ‘영원의 철학’을 향한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외침이다. 즉, 세계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구조가 있으며 인간은 이성과 과학을 통해 자연을 탐구하면서 그 구조를 ‘발견’하고 적응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벌린은 이런 특징을 통해 낭만주의가 “확실히 우리 시대 서구 의식의 가장 커다란 변혁”이라고 강조한다.

벌린의 분석에 따르면 낭만주의 사조는 칸트로부터 시작된다. 칸트는 자유 의지를 강조하면서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바깥에 무언가에 의존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원천이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이를 통해 가치를 생성할 수 있어야 완전한 도적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 강조한 칸트, 낭만주의의 시초가 되다

칸트는 이성을 통해 모든 인간이 동일한 답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낭만주의의 자유롭고 다원주의적 특징과는 전혀 반대된다. 하지만 칸트가 강조했던 ‘자유’라는 개념은 칸트의 충실한 제자였던 실러를 거쳐 확대된다. 실러는 칸트가 우리를 매우 협소한 도덕의 길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하며 특정한 정답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실러는 자유롭게 상상하고 발명하는 예술가처럼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은 자연의 규칙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규칙에 복종한다고 주장했다. 실러는 코르네유의 희곡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아이들을 산 채로 끓는 물에 삶아버린 주인공이 자연의 모성 본능에 도전하고 자식을 향한 자신의 애정에 도전해 자유롭게 행동했기 때문에 영웅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실러의 사상은 ‘위대한 죄인’ 개념을 낳고 이는 낭만주의 문학에서 변용된다.

벌린은 이처럼 낭만주의가 자기 파멸적으로 전개되면서 나치당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벌린은 여기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고삐 풀린 낭만주의가 파국을 낳자 사람들은 관용의 중요성을 깨닫된 것이다. 벌린이 보기에 현대 사회는 개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와 보편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는 전통이 혼재돼 있다. 이를테면 히틀러처럼 너무 과격하게 한 민족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은 비판받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개개인이 갖는 다양한 삶의 가치들은 존중받는다. 벌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두 세계의 아이들”인 셈이다.

정민기 기자 bonsens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