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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돌 허용? 금지? "실험적으로 접근해보자"
리얼돌 허용? 금지? "실험적으로 접근해보자"
  • 정민기
  • 승인 2021.05.04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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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논문_「리얼돌과 섹스로봇의 상징성 문제」(과학철학 23권 3호) _ 김태경 카이스트 겸직 교수

사람의 모습과 촉감을 본뜬 실리콘 성(性)기구 ‘리얼돌(real doll)’을 둘러싼 논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지난 15일 <조선일보>는 전국에 150곳이 넘는 ‘리얼돌 체험방’이 영업중이며 인근 지역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한 정윤석 작가의 작품이 리얼돌을 주제로 삼아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2019년 7월에는 리얼돌 수입과 판매를 금지해달라는 국민청원에 26만여 명이 참여했다. 정부는 “사법부의 확정판결을 따르며, 그 판결 취지를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며 아동형상 리얼돌과 특정 인물의 얼굴과 체형을 본뜬 맞춤형 주문제작 리얼돌의 규제를 강화해나가겠다고 답했다.

리얼돌을 둘러싼 논쟁이 공론화된 지 3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은 별로 없다. 지난달 4일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아동형상 리얼돌 규제 법안’을 발의했지만 성인형상 리얼돌에 관한 규제나 리얼돌 체험방 규제와 관련된 법안은 아직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황이다.

리얼돌은 인간의 존엄성부터 개인의 자유, 정부의 간섭, 여성의 사물화, 성적 유아론 등의 철학적인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보다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토론이 필요하다.

<교수신문>은 지난해 11월 과학철학 23권 3호에 발표된 김태경 카이스트 겸직교수의 논문 「리얼돌과 섹스로봇의 상징성 문제」의 일부를 요약·발췌한다.

요약·정리 정민기 기자 bonsense@kyou.net


빠르게 생겨나는 '리얼돌 체험방'... 매춘과 유사
파급효과 정확히 알려면 '실증적 근거' 쌓아야해

본 논문은 리얼돌이 여성이 갖는 불평등한 상징을 실재적으로 구체화시키고 나아가 인격의 훼손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주장에 주목한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이 ‘우연적 상징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네허(Danaher)의 분석을 짚고, 리얼돌의 사용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를 이러한 우연적 상징성에 기반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리얼돌이 야기할 문제는 상징성 기반이 아닌 ‘실천적 근거’로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먼저 영국에서 안티섹스로봇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캐이틀린 리차드슨과 윤지영 건국대 부설 몸문화연구소 교수의 주장을 검토한다.

리차드슨은 리얼돌이 사람을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매춘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돈을 가진 성 매수자는 상대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에 따라 행위할 것을 요구하고, 상대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관계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매수자는 타자의 존재 지위나 성적 욕구와 취향 등을 인정하지 않고 타자를 자신의 욕망의 현상이나 관념으로 축소시켜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이 실재하다고 여기는 것을 ‘성적인 유아론(sexual solipsism)’에 빠진다. 리얼돌은 매춘과 유사하게 성적 유아론을 구체화한다.

윤지영 역시 리얼돌이 남성의 성적인 유아론을 강화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리얼돌은 여성의 신체 형상에서 동의·저항·거부의 가능성을 삭제한 후 수용적인 신체를 여성의 기본형으로 놓는 인식 왜곡의 장소로 기능한다. 또한, 리얼돌은 남성의 성적 욕구와 판타지를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시뮬레이션 장소로 기능하며 성적 유아론을 강화한다. 성적 유아론은 성적 행위의 주체가 타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얼마든지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 인식하게 하며, 이는 ‘사물의 인간화’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사물화’로 이어진다. 즉, 리얼돌을 과시하고 후기를 공유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그 과정에서 여성에게 리얼돌의 특성들이 옮겨붙게 된다. 

‘우연적 상징’보다 ‘실증적 근거’ 필요해

따라서 리얼돌 수입허가 문제는 단순히 국가가 개인의 사적 영역에 개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특히 여성)에 대한 불평등하고 왜곡된 의미의 확대를 허용하냐에 대한 문제로 봐야 한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리얼돌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성적 유아론’을 구축하는 장치이다.

2. 성적 유아론의 관점은 성적 대상의 욕망과 관점의 실재성을 제거한다.

3. 이는 인간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4. 따라서 리얼돌의 제작과 사용은 금지되어야 한다.

데네허의 분석에 따르면 리얼돌 사용 반대 입장은 ‘상징적 결과논증’이다. 이는 특정한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임의적으로 긍정 혹은 부정의 의미를 부여하고 이로부터 그 현상이나 사물과 관련된 행위의 결과가 해당 상징성으로부터 도출된다는 주장을 말한다. 즉 리얼돌이 인간에 대한 태도나 일반적인 성규범에 반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이러한 상징성은 실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얼돌을 대하는 태도나 행위가 다른 인간에게까지 확대될지를 단순히 유사성으로 예측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검투사와 비슷하다고 해서 이 둘의 행위와 목적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어떤 행위나 대상에 부과된 상징성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이 과정에서 부정과 긍정이 뒤바뀌는 경우도 많다. 

'제한적 허용' 통해 실험적으로 접근하자

데네허는 현재까지 리얼돌과 관련된 충분한 경험적 근거가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리얼돌의 인간성 훼손이나 성적 유아론 강화를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리얼돌 사용을 반대하는 진영은 단지 임의적으로 부여된 부정적 상징에 근거해 리얼돌의 위험성을 예측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가 "리얼돌을 상용화해도 부정적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리얼돌 상용화를 반대할 때는 조금 더 실증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실험적 접근’을 제안한다. 일단 제한적으로 리얼돌을 허용하고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지켜본 다음,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적절한 대안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다만 리얼돌의 실험적 접근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는 있다. 필자의 주장처럼, 리얼돌 문제에 대한 실증적인 접근과 이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학계에서도 열린 토론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태경 카이스트 겸직 교수
한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석사, 영국 요크대에서 심리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현재 한밭대 인문교양학부에서 강사를,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에서 겸직교수를, 성균관대 철학과 인문교육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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