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김예림의 입장을 보자. 최근 유행하는 국문학 연구의 방법론은 포스트콜로니얼의 관점이고, 김예림은 이런 유행 위에 서 있다. “욕망은 그것의 적나라함을 은폐하거나 정당화시키기 위해 복합적인 변형과 변태를 실행한다. 도대체 욕망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대상 작가들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연구자 김예림의 욕망이다. 마치 일본군 장교가 자신의 칼을 자랑하기 위해 중국인의 목을 단번에 내려치듯이, 자신이 선택한 방법론을 부각시키기 위해 실증적인 사실들을 과감하게 배제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폭을 줄이기 위해 이태준과 김동리를 다룬 제1부의 4장만 살펴보기로 한다.
이태준과 김동리는 근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대동아공영론에 동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90년대 그렇게 시끄럽게 탈근대를 떠들어대던 학자들이 대동아공영론의 망령을 되살리고자 노력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김예림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먼저 나는 김동리가 일제와 단호하게 협력을 거부한 사례를 1940년에 한정하여 간단히 제시한다. 첫째, '人文評論'과 '文章'에 보낸 소설 '少女'와 '下弦'이 일제의 검열에 걸려 전면 삭제 당했다. 둘째, 친일어용문학단체로부터 가입원서가 두 번이나 날아오지만 아궁이에 처넣어 버렸다. 이것이 김동리의 의식이었다. 김예림은 김동리의 이런 측면을 은폐하고자 김동리를 자꾸 ‘순수’의 틀로 몰아간다. 하지만, 해방 이후 김동리의 문학관을 그 이전까지 그대로 덧씌워서 파악해서는 곤란하다. '산화'라든가 '찔레꽃', '동구 앞길', '혼구' 등에 나타나는 작가의 현실 감각은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또한 김예림은 '黃土記'의 공간적인 배경을 들어 근대에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부정을 읽어낸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선의 상황이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 당나라 장수에 의해 맥이 잘린 絶脈說이 식민지 조선 위에 그대로 겹쳐지지 않는가. 傷龍說이나 ‘아기장수 설화’를 차용한 인물 억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김예림이 언급하지 않은 '두꺼비'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벌건 능구렁이에게 잡아먹힌 두꺼비가 능구렁이 마디마다에서 불개미 떼처럼 까맣게 되살아오는 ‘두꺼비 설화’는 일제로부터의 조국 해방을 상징한다. 김예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김동리의 논문 '新世代의 精神'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나의 作品世界에 가끔 民俗을 導入함에 對해서는 또 이밖에 나대로 다른 理由가 있으나 그것은 省略한다”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식민지 말기의 억압적 상황을 전제한다면, 김동리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내세우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巫女圖'를 파악하는 관점 또한 문제가 크다. 물론 김동리는 '巫女圖'에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대결을 담아내었고, '新世代의 精神'을 통해 그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김동리는 그 동양정신이 ‘朝鮮의 巫俗’이라는 사실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김예림은 그 사실을 누락시키고 있으나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김동리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김동리는 무당을 가톨릭의 ‘신부’, 인도의 ‘바라문’에 값하는 ‘화랑의 후예’로서 파악하였다. 김동리가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상적 근거는 이 위에서 움터 올랐다. 그리고 이런 김동리의 뒤에는 거대한 산처럼 凡父가 자리하고 있다. 김동리는 범부를 ‘半神的 人間’으로 떠받들며 논리의 거점을 마련했다. 이를 둘러싼 실증과 사상적 맥락을 배제하고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성싶다.
김동리에 대한 자료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인다. 김동리의 ‘소멸 행위’를 분석하면서 김예림은 '먼산바라기'를 민음사판 '김동리 전집'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등신불'(정음사, 1963)에 실려 있던 것이다. 분석을 제대로 하고자 했다면 '중앙' 1936년 9월호에 실렸던 '山祭'를 인용했어야 했다. '山祭'에서 '山이야기'('民主警察', 제3권 4호)로, 다시 '먼산바라기'로 改題되면서 내용 또한 많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먼산바라기'를 통해 김예림이 분석해내는 것은 “추악과 소음과 아우성으로 가득 찬 세계를 향한 절대적인 적의와 환멸”이지만, '山祭'의 도입부는 그와 아주 다르다. “저 힌 눈은 시방 이 집밖에 온 마을과 시내와 뫼와 먼 들에도 나란히 나린다……하고 생각하면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저 푸군히 나리는 눈과함께 언제나 떠오르는 태평이의 얼굴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새하얀 눈일른지 모른다.”
이태준에 대한 언급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1938년 3월 1일에 발표한 '참다운 예술가 노릇 이제부터 시작할 결심이다'에서 이태준은 새로운 작품 창작의 의지를 밝힌다. 이태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러한 결심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 김예림은 1941년 발행된 '무서록'을 인용하면서 그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무서록'에 나타난 동양에 대한 이태준의 관심을 모두 한데 묶어 대동아공영론으로 파악해 버리는 것이다. 정작 이태준은 대동아공영권이 발흥할 즈음 오히려 동양이나 고완의 세계에서 생활의 부분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고완의 세계에 빠져들기보다 생활에 관심 가질 것을 강조하는 '古翫品과 生活'('문장', 1940.10)과 같은 수필이 분석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여기서 추론할 수 있다. “우리 동양 사람은, 우리 조선 사람이지, 자연에들 너무 돌아와 걱정이야.…(중략)…자연으로 돌아와야할 건 서양사람들이지. 우린 반대야. 문명으루, 도회지루, 역사가 만들어지는 데루 자꾸 나가야 돼…….”라는 주장이 담긴 소설 '영월영감'('문장', 1939.2.3)의 내용이 무시되는 것은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김예림은 이러한 작가의식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역사의 현장을 강조하는 주인공이 광산에서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는 장면을 통해 ‘금전의 논리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과연 독립 자금 확보를 위해 광산에 손을 댄 인물이 단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금전의 논리’에 희생당한 것일까. 그리고 “履霜堅氷至”를 중얼거리며 험난한 앞날을 예감하는 '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에는 과연 민족의식이 드러나지 않는가. 이어서 발표된 '고향', '農軍'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민족의식 또한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없다. 동양에 관심을 가졌다고 모두 일제의 대공아공영론에 묶였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교했을 때 김재용의 '협력과 저항'은 나름의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여기서 나름의 균형 감각이란 지식인이 삶의 기로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는 논리적 근거와 정당화가 동반되게 마련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근대화론의 연장에서 친일을 행한 백철·이광수의 사례, 근대초극론의 최재서·채만식·서정주의 사례가 체계 있게 분석돼 있다. 뿐만 아니라 친일의 시점이 친일의 논리와 맞물리는 상황이 재미있게 다가온다. 예컨대 1938년 10월 ‘동양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던 중국의 무한 삼진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전근대(중국)와 근대(일본)의 대결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라는 인식이 조선 지식인 사이에 급속하게 확산된다. 중국의 승리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사라지게 근대화론에 기반한 친일의 논리는 정당성을 주장하며 논리적 체계를 갖추어 나간 것은 물론이다.
두 번째 친일의 논리적 틀은 1940년 등장하기 시작한다. 1940년 3월 중국에 들어선 왕정위 정부는 친일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일본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론이 이로써 상당한 힘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6월 프랑스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된다. 근대정신의 상징인 파리의 함락은 또한 근대초극의 논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근대를 ‘舊體制’로 파악하는 데 따라 이후의 세계는 ‘新體制’라 논의됐다. 물론 근대를 비판한다고 하여 곧장 대동아공영론이나 신체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 대한 섬세한 논의가 전개되지 못한 것은 '협력과 저항'의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김재용은 김예림이 범한 오류를 가뿐히 넘어서고 있다. 역사 의식에 뿌리를 내린 실증적인 태도가 그만큼 분명하다는 증거이다.
김기림, 한설야, 김사량의 태도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냉엄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렸던 지식인의 내적 논리가 있었던 반면, 이와 맞서기 위해서도 스스로의 논리는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 작가들은 그런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적인 제약 탓에 각각의 논리는 선명하지가 않다. 우회적으로 글을 쓴다거나, 침묵으로 맞선다거나, 망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는 모두 다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어’라는 따위의 옹호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힘이 들더라도, 이러한 태도의 연구를 견지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김예림의 연구에 비판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나의 입장에서 비롯됐다.
우리 안에 파시스트의 유혹이 존재한다고 해 모두 파시스트인 것은 아니다. 식민지 체제에 안주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해 모두 친일문인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틀이야말로 동일화의 욕망 노출에 불과할 따름이 아닐까. 소박한 민족감정에 묶여 친일을 벌였던 인물에 대해 그저 ‘단죄’로만 나아가는 것은 문제다. 여론 재판의 형식에 과거사 청산을 맡길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소박한 민족감정의 반편향으로만 나아가는 태도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역사적 감각의 불모만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친일담론 관련 국문학계 연구흐름 포스트콜로니얼의 방법론을 한국문학 연구에 적용하여 시선을 끌었던 저서로는 '문학 속의 파시즘'(삼인 刊, 2001)을 들 수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우리 안의 파시즘' 논의와 기본적 입장을 같이 한다.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필진들의 면면. 권명아(연세대 강사), 김예림(연세대 강사), 김철(연세대 국문과 교수), 김현주(연세대 강사), 백문임(연세대 강사), 신형기(연세대 국문과 교수), 이경훈(연세대 국문과 교수), 차승기(연세대 강사). 여기서 연세대 국문학 전공자들이 이러한 흐름을 촉발시켰고, 주도해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필자는 중앙대에서 '김동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시기 세대논쟁 연구' 등의 논문이, '페르세우스의 방패', '1930년대 문학과 근대체험', '북한문학의 이념과 실체' 등의 저서가 있다.
친일 문제에 있어 연구자의 주관적 해석은 아직 이르다고 판단됩니다. 그것은 1940년-45년 시기의 문학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이에 대한 문학 연구자들의 관심이 저조한 탓도 있습니다.
실증적 차원이 아닌, 심증적 차원에서 논의를 진행하다보니 김예림의 논리는 설득력이 상당히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문학에 대한 온전한 복원, 그리고 전 시기와 그 후 시기와의 연관성을 면밀히 검토해야만
친일문학의 외형이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