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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교수신문
  • 승인 2021.04.2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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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일 지음 | 청림출판 | 388쪽

수치에 중독되었으면서도 부끄러움이 마비된 ‘수치 사회’

“수치를 모르는 친일파들,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도 있구나!”
“후안무치와 철면피는 어떻게 정치인들의 미덕이 되었는가?”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내로남불 운영”
“부끄러움을 잊어버린 세상, 한국이 야만 사회가 되고 있다”
“과거를 잊고 부끄러울 줄 모르는 일본의 태도에 분노한다”

근래 주요 일간지 기사들의 제목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수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실을 개탄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또한 신뢰와 더불어 개인을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쓰이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석학들이 수치에 대해 고민하고 수많은 학문들이 수치에 매달린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신화적 상징에서 아담과 이브가 이성을 갖추고 난 뒤 수치에 사로잡히면서 인류 역사가 시작되었듯, 인간은 뭇 동물들 가운데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종이다. 만약 얼굴을 붉힐 만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낯’이 뜨거워지고, 이러한 ‘체면’을 살피지 못하면 ‘후안무치’나 ‘철면피’라는 모욕을 듣는다. 그래서 ‘쪽팔리다’라는 속어는 우리가 얼마나 수치라는 감정을 중시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얼굴은 영혼이나 사랑이 그렇듯 매매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처럼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절이 없었던 듯하다. 인간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약점에 대한 자백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명품에 빗대 과시하는 모습은 멋이 되었다. 부끄러움이 범람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수치가 희미해진 모순된 풍경, 훗날 지금의 한국 사회를 규정할 때 누군가는 ‘죽은 부끄러움의 사회’라는 이름을 붙일 것이고, 또 혹자는 ‘수치 중독 사회’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은 이처럼 한국 사회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수치의 실체를 규명한 최초의 시도다. 인간을 사로잡아온 수치라는 감정을 통해 우리에게 부끄러움이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추적하고, 왜 우리는 수치에 얽매이게 되었으며 동시에 왜 부끄러움을 망각하게 되었는지 모순된 풍경을 해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 책의 저자 이창일 책임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은 철학과 심리학을 동시에 천착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화부터 인류 역사, 정신분석학과 뇌과학, 언어학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수치를 분석하고, 그 작업을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인간을 완성시키는 감정이자 인간을 파괴하는 감정, 수치의 두 얼굴

“부끄러움, 사람을 완성시키는 최소한의 마음”
vs.
“수치,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어두운 감정”

윤리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이러한 규범을 일종의 상식으로 내면화하며, 그것이 어긋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심리적인 규제를 가하게 된다. 이때 전제되는 심리가 바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반응, 수치다.
수치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수치심은 타자를 의식한 감정이자 스스로를 관조하는 시선이라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부끄러움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차원의 의식이자 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맹자와 다윈이 오직 인간만이 수치를 느낄 수 있다고 얘기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무리의 규범을 무시한 짐승이 무리에서 쫓겨나는 경우는 있지만 집단 속에서 부끄러움을 느껴 무리를 떠나는 경우는, 적어도 동물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앞서 지금이 수치가 만연하고 부끄러움이 사라진 모순된 세상이라고 했지만, 그 배경에는 이와 같은 수치라는 감정이 지닌 특성이 깔려 있다. 애초에 수치는 야누스와 같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 것이다. 하나는 인간의 근원에 도사린 감정의 지옥이다. 실제로 ‘아담이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이래’ 수치란 감정은 인류 역사에서 주로 부정적인 맥락에서 동원되어왔다. 망신살이 뻗치고, 인간관계가 파탄이 나며, 전인격이 부정당하는 공포에 시달리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될 때 사로잡히는 감정이 바로 수치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수치의 아래쪽 얼굴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부끄러움에는 옛 선비들이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감정’이라고 강조했던 염치, 디트리히 본회퍼가 이야기하는 타인과의 공존을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태도에 가까운 개념도 들어 있다. 그래서 남명 조식은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방울을 달고 다녔고 정약용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인간이고자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는 태도인 ‘신독’을 재해석했다. 그리고 경술국치를 맞아 매천 황현은 “나라에서 오백 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국난을 당해 죽는 이 하나도 없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평생을 패배가 예정된 싸움에 매달렸던 독립운동가들의 가슴속과, 모어를 잃고 다만 시를 통해 부끄러움을 고백하다가 잔혹하게 살해된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이를 가리켜 수치의 위쪽 얼굴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에서는 수치의 정체에 대해 섣부르게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축적한 수치에 대한 모든 지식을 훑어 내려가 수치가 가진 위와 아래 두 얼굴을 직시하고자 한다.

한 권으로 읽는 수치 또는 부끄러움에 대한 모든 것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_윤동주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_맹자
“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바탕으로 삶으로 나아갔다.” _카를 융
“수치는 필멸하는 인간의 육신에 남은 죄의 법이다.” _아우구스티누스
“시스템에 의해 내면화된 수치는 가장 위험한 악마다.” _존 브래드쇼

구체적으로 이 책에서 정리한 수치의 정체와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장은 수치에 대해 언어학과 자연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앞서 이 책의 주제인 수치를 소개할 때 수치와 부끄러움을 구분해서 사용했다. 한국인들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수치라는 감정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구분한다. 예를 들어 부끄러움, 수치, 창피, 민망, 면구, 쪽, 가오, 수줍음, 남우세, 망신, 쑥스러움 등의 명사는 물론이고 뒤통수를 긁적이고, 얼굴을 가리고, 손이 떨리고, 고개가 숙여지고, 몸이 오그라지는 등의 동사와 형용사로도 감정을 나눠 표현한다. 이 책에서는 이들 수치를 가리키는 언어의 스펙트럼을 문학작품들과 언론을 사례로 들어 구분한다. 이어서 진화생물학과 신경생리학에서 수치라는 감정을 들여다본 결과를 정리한다. 자연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수치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적응하면서 뇌 속에 기입된 ‘이차 감정’이며, ‘공감 감정’이다.
그 다음으로는 수치의 아래쪽 얼굴을 살핀다. 이를 위해 서구문화의 바탕인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수치의 원형을 알아보고, 왜 수치가 음탕한 욕망과 규범을 배신한 죄의식이 한데 묶인 부정적 감정의 제왕이 되었는지를 살핀다. 뒤이어 역사를 동물성과 이성의 대립이자 자연에 대한 정복 과정으로 파악한 종교적 관념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지양한 프로이트와 융, 코헛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통해 파괴적인 감정이자 동시에 긍정적 역할도 하는 수치의 양면성을 살핀다. 이른바 정신분석은 자연과 문명의 중간에 끼인 수치를 전통 속에서 다루되 ‘타락으로 유혹하는 음란한 정욕’이라는 가치 평가는 배제하고 인간 안에 있는 동물성을 인정했다. 그럼으로써 수치는 원초적인 죄에서 벗어나 인간이 동물이 되는 것을 막아주는 ‘정신의 댐’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어서 수치의 위쪽 얼굴을 분석하면서, 서구 신화학과 자연과학에서 동양의 철학으로 초점을 옮긴다. 유교 사상에서 수치는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선을 지향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은 공감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기에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공감이라는 감정이 마비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비인非人’(인간이 아닌 존재)으로 부르는데, 교감을 할 줄 알되 공감할 줄은 모르는 존재를 가리키는 오늘날 ‘사이코패스’와 일치한다. 수치를 수양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파악하고 수치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는 사상은 바로 이러한 반사회적 성격 장애를 가진 존재들에 대한 인간과 사회의 대응 방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수치의 철학과 미학을 역사적 인물들의 실제 삶에 적용해 살펴봄으로써 부끄러운 줄 모르는 시절이 생겨난 이유의 최종적인 답을 짚어본다. 생존 경쟁 아래에서 즐거이 경쟁하며 스스로와 타인의 값어치를 수시로 재평가하는 것을 내면화한 이래 현대인 내내 벌거벗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교감하되 공감은 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공감을 끄고 켤 수 있는 스위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만사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사이코패스들의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이처럼 ‘비인’과 ‘소인’을 권하는 사회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 부끄러움

“이 땅의 무서운 규모가 우리를 키웠습니다.” _ 자신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까닭을 밝히며, 이육사

오늘날 우리는 모든 사건을 연극적으로, 위악적으로 소비하며 비극에도 무감해졌다. 현대사회에서 파편화된 개인은 자존이라는 덕목을 통해 공동체적 가치가 무너진 데 따른 충격을 이겨낸다. 그러나 타인과 공감하고 공감 받는다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포기하고 ‘혼자서 살아남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한 결과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공감을 폐기한 사회에서 개인이 관계를 파악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아 구분과 자기 증명이다. 모든 관계를 승패와 손익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시를 받는다는 데에서 오는 모멸감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역으로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부끄러움에는 둔감해지게 된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이 사라진 세상이다.
‘강호의 도의가 땅에 떨어졌다’는 시쳇말이 있다. 여기서 도의란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는 상식이자 최소한의 인간다움에 대한 합의일 것이다. 안타까운 부고 앞에서 위악적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이익집단의 정치적 구호부터 드러내고, 폭력의 희생자에게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시 가해를 가하는 것이 어느 정도 당연시된 현상에는 이처럼 모멸감에 민감하고 수치감에는 둔감한 세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수치에 중독되고 부끄러움에 마비된 지금 여기에서 부끄러움을 다시 들여다봐는 까닭이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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