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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_미국학은 존재하는가
학술동향_미국학은 존재하는가
  • 최철규 기자
  • 승인 2004.09.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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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분야의 비판적 연구 늘어

한국에서의 미국학은 문화사적·지성사적 접근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주요 탐구대상으로 삼는 미국식 미국학의 지적 풍토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에 대해 문제제기가 일고 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외교적 측면들을 폭넓게 수용해 ‘전체로서의 미국’을 미국학의 탐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학문으로서의 미국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국학에서 탈피할 때 미국에 대한 객관적 연구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급진적 입장들도 있다.

문화사적 접근을 통해 ‘미국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현재 미국 내 미국학의 주류는 단일한 실체로서의 ‘미국적 정신’을 상정하는 전체론적 문화관을 탈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대신 여성, 흑인, 외국인 등 사회 내 소수집단 문제를 문화다원주의의 시각으로 분석해 미국사회의 다양한 정체성을 모아가는 방향으로 나간다. 이는 1980년대부터 데리다의 해체이론과 푸코의 후기구조주의 등이 미 대륙에 상륙하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계보를 비판적으로 잇는 가야트리 스피박, 쥬디스 버틀러 같은 탈식민론자들이 대학 내에 자리를 넓혀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연구방법과 주제는 한국 내 미국연구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정상준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는 로티의 신실용주의를 기반으로 미국의 다문화주의와 민주주의의 밀접한 상관성을 조명하고 있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 분석을 통해 다문화적 요소와 미국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연구도 단골 메뉴다.

그러나 건국대 이주영 교수(사학)는 “미국 사회의 탈근대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적합한 이론을 근대적 시간대에 속한 한국 사회에 그대로 유입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의 미국학의 의의를 간과한 것”이라 비판한다. 진보-좌파적 관점에 편향된 미국 내 미국학의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한국에 유익한 미국적 속성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적 근대를 일군 ‘개인주의, 청교도주의, 도덕주의’등의 전통 보수주의적 이념들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러한 ‘미국적 정신’이 지니는 보편성 여부다. ‘미국적 정신’이란 단지 역사적으로 과장된 하나의 신화적 이미지에 불과하며, 미국예외주의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은 미국 내에서도 이미 충분히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예외주의의 신화적 표현일 뿐인 ‘미국적 정신’에서 한국에 유익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이 교수의 시각은 미국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져 오히려 한국적 맥락이 사장된 ‘한국의 미국학’으로 전락할 위험마저도 있다.

한편, 문화사 중심 연구의 협소함을 탈피하여 미국의 정치, 경제, 외교 등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은 줄곧 제기된 문제였으나 아직까지도 연구자들간에 이론적 합의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 미국학연구소가 미국학 총서 시리즈를 통해 학제적 접근을 표방하며 연구 범위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지만,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는 “연구소장의 변경에 따른 연구소 성격의 변화일 뿐, 학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시도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미국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여러 분야의 병렬적인 나열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권 교수는 문화 연구 중심으로 ‘미국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미국내 미국학자들의 연구나, 이를 ‘객관’의 이름으로 단순 모방하는 한국 내 미국학자들의 연구가 미국학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기존의 미국학이 제시한 것은 결국 “하나의 신화화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섣부르게 통합적 학문으로서의 ‘미국학’ 구축 시도를 고집하지 말고 역사, 문화, 정치, 경제 등을 세분화해 ‘지역연구’ 차원에서 진행시켜야 한다는 게 권 교수의 결론이다.

 따라서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한길사 刊), 박찬욱 교수 등이 집필한 ‘미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오름 刊), ‘미국 자본주의 해부’(김진방 외 지음, 풀빛 刊) 같은 거시적 차원에서의 비판적 분석과 한 분야에 대한 객관적이면서도 집중적인 분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미국에 대한 대다수의 논문들이 미국의 권력집단, 대외 및 군사정책에 편중돼 있는 점이 지적된다. 미국의 정책변화에 영향을 받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초미의 관심사일 수 있지만, 정치학, 외교학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연구가 이뤄지고, 비슷비슷한 소재, 관점과 수준의 연구물을 내놓을 뿐, 깊이 파고 들어가거나, 지속적인 후속연구들을 내놓는 경우가 없어 일회성 정책자료집이나 연구실적물로 그치고 만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반면, 김남균 평택대 교수(미국사)는 현재 미국학의 불분명한 학문적 정체성을 과도기상의 문제로 볼 뿐, 학문으로서의 미국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미국학이 학제적 접근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김 교수는 미국학에 대한 ‘과잉 비판’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근본적으로 모든 학문이 학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바, 유독 역사가 일천한 미국학만 비판의 표적이 돼서는 곤란하다는 것.

이것 아니면 저것식의 택일적 시각을 지양하고 미국에 대한 보다 생산적인 연구 풍토를 조성하자는 움직임도 보인다. 백창재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미국식 미국학의 연구영역을 인정하되, 외부에서 바라본 미국의 모습도 미국학의 주요 연구 대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분과 중심의 단순 병렬적인 학제적 접근을 넘어서서 정치학적 접근에 경제, 문화적 시각 등을 수직적 계열로 통합시키는 ‘다층적 접근’을 지향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을 바라보는 상이한 시각을 지닌 연구자들이 한데 모여 논의를 할 여건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일방의 공허한 주장만이 메아리치는 현재의 풍토에서는 ‘미국’ 없는 ‘미국학’이 되는 역설적 상황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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