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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다리의 '곡선', 신기술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다
냉장고 다리의 '곡선', 신기술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다
  • 오창섭
  • 승인 2021.04.28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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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②] 오창섭 건국대 교수

2020년은 인류 역사에서 특별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많은 것을 변화시켰고, 현재에도 변화시키고 있는 코로나 19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2020년은 기억에 남는 해였다. 8월 말 코로나 19의 재확산으로 준비하던 ‘행복의 기호들’ 전시를 급하게 온라인으로 변경하면서 여러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행복의 기호들’도 코로나 19와의 관계 속에서 기획된 전시였다. 작년 초 국내 확진자 수가 증가할 무렵, 질병관리본부는 앞으로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고, 따라서 새로운 일상을 준비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고, 전문가들은 발 빠르게 변화할 일상에 관한 예측과 의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을 접하면서 나는 ‘지금 주목해보아야 하는 것은 오히려 코로나 19 이전의 일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행복의 기호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기획되었다. 코로나 19 이전에 우리는 어떤 일상을 살았는지, 그 속에서 디자인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은 톤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냉장고 대중화를 이끈 디자인

모니터 톱 냉장고는 ‘행복의 기호들’의 여러 전시품 중 하나였다. 1927년 미국의 GE가 만든 이 냉장고는 냉장고 대중화에 획을 그은 제품이다. 이전에도 전기냉장고가 있었지만, 자동차 두 대에 맞먹는 고가인 데다가 폭발하는 경우도 있어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모니터 톱은 외형을 강철판으로 제작한 최초의 냉장고였다. GE는 이 점을 안전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홍보했다. 모니터 톱 냉장고의 이름은 윗부분의 동그란 원통형의 응축기에서 비롯되었다. 그 모양이 남북전쟁 당시의 북군의 철갑 군함인 USS Monitor의 포탑을 닮았다고 해서 ‘모니터 톱 냉장고’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GE가 만든 냉장고
GE가 만든 냉장고. 가구처럼 곡선 다리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 냉장고의 매끄럽고 하얀 외관은 당시 사회적 관심사로 부상하던 위생을 환기하며 위생적 제품이라는 인상을 사용자들에게 갖도록 했다. 냉장고를 지탱하고 있는 4개의 다리 모양도 특이하다. 이런 형태의 다리를 ‘카브리올 레그(Cabriole leg)’라고 하는데, 그 기원은 그리스 로마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초 영국 앤 여왕 시절에 유행했기 때문에 ‘앤 여왕 스타일의 다리’로도 불리는데, 주로 장식적인 원목 가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리 형태다. 제품의 다리 모양을 그렇게 한 것은 초기 냉장고가 가구의 맥락 속에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냉장고와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제품이 가정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사용자가 가질 수 있는 이질감과 낯섦을 해소하기 위해 가구의 조형 언어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구처럼 보이면 아무래도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1930년에 도시바가 생산한 일본 최초의 냉장고가 이 제품과 같은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모양이 똑같았다. 전시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모니터 톱 냉장고가 혹시 도시바의 제품이 아닌가 확인까지 해 보았을 정도였다. 어느 나라나 산업발전 초기 단계에서는 그렇게 모방 전략을 통해 앞선 나라를 추종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일본만 그랬던 게 아니다. 우리도 그랬고 중국도 그랬다. 나는 모니터 톱 냉장고와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낸 직후 일본인들이 얼마나 행복해했을지, 그리고 자신들을 얼마나 뿌듯하게 여겼을 지를 떠올려보았다. 코믹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좋았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일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뿌듯함을 느끼고 행복해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그들도 우리도 그런 디자인의 세계에 자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디자인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흔히 비전공자들은 ‘디자인? 그거 예쁘게 만들고 꾸미는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인다. 물론 그것도 디자인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다. 모니터 톱 냉장고의 사례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디자인은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게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디자인을 매개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상이나 기술도, 어떤 아이디어나 취향도 경험할 수 없는 그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디자인의 역량은 그러한 사상, 취향, 기술, 아이디어 등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사상, 취향, 기술, 아이디어 등을 깨닫고 느끼고 즐긴다.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디자인은 삶을 조형하고 삶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창섭 건국대 교수·예술디자인대

오창섭 건국대 교수·예술디자인대

디자인연구자다. 현재 건국대 예술디자인대 교수이며 ‘메타디자인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디자인학회 최우수 논문상(2013)을 받았으며, 문화역 서울284에서「안녕, 낯선 사람」(2017)과 DDP디자인뮤지엄에서 「행복의 기호들」(2020)을 기획했다. 주요 저서로는 『내 곁의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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