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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오독', '불성실한 이해'로 지성적 토론이 가능한가
'착각'과 '오독', '불성실한 이해'로 지성적 토론이 가능한가
  • 변홍철 편집장
  • 승인 2004.09.10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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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담론' 진단에 대한 반론

변홍철 / 녹색평론 편집장

'교수신문' 제328호(2004년 9월 20일)의 '진단―한국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이하 '기사')은 핵심 논지를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 전개가 매우 조악하고 심지어 주요한 사실들을 왜곡하고 있는 최악의 기사였다. '지성적인 언론'을 지향하는 '교수신문'의 역할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독자로서 이번 기사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녹색평론'에 대한 언급이 논리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막연한 이미지와 불성실한 이해에서 비롯된 심각한 왜곡이라는 측면에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새만금 간척사업·부안 핵폐기장·천성산 고속철관통 등 최근의 첨예한 현안들을 둘러싼 풀뿌리 민중의 치열한 저항운동의 의미를 '보상금' 운운하며 폄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기사는 "국내 생태담론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강성민 기자(이하 '기자')의 진단으로 시작한다. 이 진단이 옳은 것인지 어떤지, 여기서 길게 논의할 여유는 없다. 다만 나는 기자가 다루고자 하는 소위 생태담론이라는 것이 그 영역과 실체가 분명한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학자들의 연구실에서 조명될 수 있는 것인지, '담론'이라고 하는 것은 풀뿌리 민중의 구체적 삶과 투쟁과는 어떠한 관련을 맺는 것인지, 적절한 기회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아울러 학자 혹은 교수 개개인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나 그들의 피상적인 언설만 가지고, 어떤 인사를 특정 담론에 관한 단골 '논자'로 걸핏하면 참여시키거나 거명하는 안이한 관행이 과연 지성적인 토론에 기여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점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생태담론의 현실을 언급하면서 기자는 조명래, 한면희 교수 등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생태학계가 너무 좁아 이견이 있더라도 그냥…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논쟁다운 논쟁 한번 없"다고 현실을 개탄한다. 물론 이러한 현실평가를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사는 여기서 "현재 한국에서 생태담론이 펼쳐지는 공간" 가운데 하나인 '녹색평론'과 편집인 김종철 선생 개인의 "고유한 특성" 운운하다가 갑자기 "'녹색평론'이 배출한 스타사상가들"이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서구중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비판으로 비약해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눈에 거슬리는 문장의 부정확성, 논리전개의 허술함, 표현의 조악함 등을 지적하는 것은 기사의 전반적 수준으로 보아 지나친 요구라고 보고 논외로 하겠다.)

  기자는 이러한 비판의 주요한 논거로 박홍규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박 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에 관해 언급하면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묘사한 티베트는 정치사회를 제외한 티베트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수 티베트 민중의 억압받는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마도 이 발언은 '오래된 미래'를 두고 한 말일텐데, 그러나 이미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읽은 '오래된 미래'의 무대인 라다크 지역은 '티베트'가 아니라 인도 북부지역, 정확히는 자무와 카시미르주의 일부이다. 라다크가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까닭은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지리적 특성과 오래된 티베트 불교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자와 박홍규 교수는 완전한 '착각'을 바탕으로,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반세계화 운동의 이론가이자 투사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를 졸지에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서구중심적인" 인사로 매도해 버린 것이다. (박홍규 교수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박 교수는 '오래된 미래'를 읽긴 했지만, 그 무대가 티베트라고 '착각'했다고 시인했다가, 그러나 교수신문 기자와의 인터뷰 때에는 꼭 '오래된 미래'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고 요즘 사람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티베트와 티베트 문화, 티베트 불교 전반에 관해 말하다 보니, 기자에게 말이 잘못 전달된 것 같다고 해명하였다.)

  또한명의 "녹색평론이 배출한 스타사상가"로 기사에서 다루어진 스콧 니어링에 관한 언급 또한 명백한 '오독'에서 비롯된 왜곡이다.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의 발언을 인용해 스콧 니어링이 "청교도들의 미 대륙 침범과 인디언 학살을 삶의 개척이라고 평가"했으며, 그것은 곧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최성일 씨에게 확인해 본 결과 이것이 최씨의 견해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최씨의 '평가'의 근거가 된 텍스트인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도서출판 보리刊)나 다른 저작들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스콧 니어링이 서구문명과 제국주의에 대한 일관된 투쟁에 평생을 바친 가장 래디컬한 서구 사상가이자 평화운동의 실천가 중 한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굳이 여기에서 스콧 니어링의 사상을 옹호할 여유는 없지만, 최씨가 자신의 평가 근거로 지목한 몇 대목('그대로 갈 것인가…'의 139-144쪽)을 다시 읽어 보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스콧 니어링이 "청교도들의 미 대륙 침범과 인디언 학살을 삶의 개척이라고 평가"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출판평론가의 서평이라고 납득하기는 어려운 심각한 오독이자 넌센스라고 할 수밖에 없다. 확인 결과 기자는 이 대목에서 순전히 최씨의 서평만을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 기사는 최씨의 이러한 '오독'과 위에서 밝힌 박홍규 교수의 '착각'을 근거로 이들 "스타사상가"를 "배출"한(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경박한 표현인지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녹색평론'의 작업 전반까지도 왜곡·폄하해 버린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이 기사의 가치를 논하는 데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을 정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오보 차원이 아니라, '한국 생태담론의 현실'과 '녹색평론'의 '문제'를 논하면서 기자가 든다고 들었던 몇 안되는 근거 가운데 핵심이나 마찬가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녹색평론사에서 최근 출간한 천규석 선생의 '쌀과 민주주의'를 두고 "논리 자체가 매우 중앙집권적"이라고 평가하거나 "쌀의 신격화"라고 언급한 것은 텍스트의 전반적인 맥락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도대체 책을 일부라도 읽기나 하고 쓴 말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망언에 가깝다. 일관되게 국가와 시장의 중앙집권 및 독점에 맞서, 풀뿌리 민중의 자율·자급과 자치민주주의, 지역공동체의 회복을 호소하는 저작을 두고, 아무런 구체적인 논거도 없이 무작정 "중앙집권적"인 논리라고 평가하는 것은, 평가의 피상성을 넘어, 저자와 출판사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또한 이미 사학계의 탁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용섭·이태진 교수의 농업사 연구를 바탕으로, 한평생을 이 땅의 농촌과 공동체 회복을 위해 헌신한 노(老)운동가의 한과 피로써 서술한 '쌀의 문화사'를 두고 "쌀의 신격화" 운운하는 것은 단순히 오독이나 몰이해를 따지기 전에 기자로서의 자질 자체를 의심케 하는 망발이 아닐 수 없다. "'쌀문화'를 살리기 위해 우리사회가 성취한, 그리고 추진하고 있는 모든 의미있는 제도와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는 기자의 평가는, 참으로 단순하고 거친 이해이긴 하지만, 차라리 별도의 진지한 논의를 기대해볼 수 있다고 치자. 왜냐하면 이러한 신경질적인 반응은 이미 '생태담론' 따위와는 별개로, 현재의 개발·파괴 체제의 지배자와 기득권 세력, 거기에 영합한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녹색평론'이나 천규석 선생이 끊임없이 받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고통스런 삶을 외면하는 소위 '현실주의적'(우리가 보기에는 철저하게 '비현실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우리사회가 성취한, 그리고 추진하고 있는…의미있는 제도와 정책"들이 그렇게 대단하고 그것에 대한 "공격"은 그렇게 참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녹색평론사가 한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진행해 오다가 결국 재정적인 문제 등 현실적인 벽에 부딪쳐 중단한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기사에 언급된 '순회강연')에 대해 "몇마디 되지도 않는 내용의 강연으로 대중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생태-포퓰리즘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한 박홍규 교수의 언급('생태-포퓰리즘'이라는 생소한 개념의 출처에 대해 확인해본 결과, 박홍규 교수는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고 했고, 기자의 구구한 설명을 간추리자면, 그것은 생태문제의 본질은 회피하고 감성적인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여 영성 및 정신적 측면을 말초적으로 자극, 대중을 오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이나, "이런 식의 일방적 전진(문맥상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은…동어반복으로 귀결되는 생태주의의 파편화와 매너리즘의 악화를 낳을 뿐이다"라는 기자의 평가 등은, 도대체 어떤 구체적 사실과 내용을 대상으로 어떠한 근거에서 하는 평가인지 정확한 논거 제시가 없으므로 나로서는 이해·납득할 수 없지만, 그것이 그들 나름의 주관적인 평가일 수도 있다고 보고 여기서 더 논하지는 않겠다. 이미 말했듯이, 지금 여기에서는 제대로 된 '반론'을 개진할 여유도 없이 '착각'과 '오독'에 의한 '왜곡'을 바로잡기에도 바쁘니 말이다.

  요컨대 이 기사는 '녹색평론'이나 '21세기를 위한 사상강좌' 등의 내용을 사실은 구체적으로 읽거나 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녹색평론'에 대해 갖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만을 근거로, 고의든 아니든 '녹색평론'의 작업을 심각하게 폄하·왜곡하거나 근거없이 흠집을 낸 저열한 기사가 되어버렸다. 사실 지난 주 담당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아 이번 '진단'에서 '녹색평론'이 주요 논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오히려 기자에게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사심없는 비판이 이루어져 생산적이고 지성적인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바람을 피력하기까지 하였다. 진심으로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그에 대한 반론이나 후속토론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정확성과 논리성이 결여된 수준 이하의 기사다. 이참에 나는 이번 기사에서 '녹색평론'에 대해 한마디라도 언급한 것으로 되어있는 조명래, 한면희, 박홍규 교수 등에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 1-2년간의 '녹색평론' 가운데 몇 꼭지의 기사라도 성실히 읽고 인터뷰에 응한 것인지 허심탄회하게 묻고 싶다. 적어도 이번 기사를 쓴 강성민 기자는 그렇게 묻는 나에게 "미안하다. 막연한 이미지를 가지고 기사를 쓴 게 사실이다."(9월 21일 오후 세시경 전화통화)고 고백하였다. (아울러, 기사에서 "영성-웰빙" 운운하며 '녹색평론'의 "주요활동"이라고 한 "한살림운동"은 문맥으로 보아, 이미 조합원 9만명에 가까운 '(사)한살림'의 생협활동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한살림 생협사업을 '녹색평론'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사)한살림 관계자들이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것도 잘못된 정보인데, 이에 대해 문의하자 강 기자는 "잘못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

  잡지 편집장이 자신이 편집하는 잡지를 "제발 제대로 읽고 비판을 해달라"고, 반론 아닌 반론에서 구차스럽게 부탁해야만 하는 것이, 굳이 말하자면 우리 "한국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사실 '녹색평론' 같은 일개 '잡지'가 지식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외면받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아니 그것은 상당부분 '녹색평론' 편집진의 무능력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도 않는다. 사실 "한국 생태담론의 현실"을 논하는 지면에서 가장 주요한 논의 대상으로 '녹색평론'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로서는 과분한 일이며, 따라서 위에서 제기한 이번 기사의 문제점들은 어쩌면 불쾌한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라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내가 이번 기사를 읽고 가장 묵과할 수 없다고 본 부분은 바로 이 기사의 결론에 속하는 아래의 대목이다. "(한국의 생태담론은) 현재로서는 '이론'과 '주장'만 존재할 뿐 '대화'가 없으므로 에피고넨만 양성할 뿐이다. 그 에피고넨들이 하는 행동은 새만금사업과 파병반대를 위한 온갖 육탄저지 운동이다. 그리고 지역이기주의와의 결합이다. '생명'과 '자연'은 무조건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이고, 그런 생명과 자연이 '보상금'을 위한 희생양으로 내걸리는 게 오늘날 환경운동의 현실이다."

  에피고넨 따위의 먹물냄새 나는 개념을 들먹이며 자신의 편견과 왜곡된 정치의식을 그럴듯하게 감추려 드는 것도 역겹지만, 아무튼 기자의 현실인식대로라면, 최근 58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으로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애쓴 지율스님도, 작년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오체투지의 기도로 새만금 갯벌과 생명을 지키고자 기도했던 문규현 신부와 성직자들도, 그 뒤를 따랐던 수많은 시민들도, 또한 1년 가까이 생업을 제쳐두고 경찰의 군홧발에 짓밟혀가며 생존의 터전을 지키고자 국가권력에 맨몸으로 맞섰던 부안의 주민들도, 파병반대와 평화를 위해 이라크로 달려갔던 수많은 인간방패들과 지금도 단식으로 한국군 철군과 전쟁종식을 외치고 있는 김재복 수사, 박기범 작가 같은 이들도 모조리 "대화"의 부재에서 "양성된", 그래서 "육탄저지"밖에는 할 줄 모르는 초라한 에피고넨(모방, 아류)에 불과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고속철도 천성산 관통을 반대하는 도롱뇽 소송에 기꺼이 소송 대리인으로 나서겠다고 '도롱뇽의 친구들'에 참여하고 있는 전국 수십만의 시민들, 원흥이 방죽과 두꺼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업을 전폐하고 헌신하는 청주의 시민들, 핵발전소·핵폐기장 건설에 반대하고 국가의 에너지 정책전환을 촉구하며 십수년째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영광·울진 등의 주민들, 그밖의 모든 지역 풀뿌리 민중들의 땅과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한 눈물겨운 저항은 강성민 기자에 의해 "생명과 자연을 희생양으로 내걸"고 "보상금" 몇푼에 눈이 먼 "지역이기주의"로 매도되어 버렸다. 이 정도면 망발의 극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솔직히 '조선일보'조차도 이 정도 수준의 망언이라면 좀더 세련된 포장 속에 감추려 애쓸 것이다.

  가당찮게도 이 기사는 "생태적 삶은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것"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민주주의를 운운하며 끝을 맺고 있다. "지난 부안사태때 자발적 시민불복종 운동을 조직해서 그것을 시민자치운동, 반핵, 반원자력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고 스스로 말한 박홍규 교수가 "정치적인 민주화가 없는 생태운동이 참 무의미하"다고 한 발언을 인용하면서, 기자는 "생태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 민주주의를 실질화, 토착화시키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며, "생태주의가 민주주의와 만나는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의를 재정의해야 가능할 것"이라며 요령부득의 훈수를 두고 있다. 글 전체의 맥락과 분리시켜 이 대목만을 떼놓고 본다면, 이러한 진단은 꽤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새로운 논의로 나아가는 데 어떤 실마리를 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전체 맥락과 함께 생각한다면, 이같은 결론은 이해할 수 없는 함정으로 빠진다. 도대체 지역공동체와 땅을 지키려는 풀뿌리 민중의 저항을 "지역이기주의"라고 이해하는 기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아니나 다를까, 나와의 전화통화에서 강 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미 우리사회가 이루어놓은 '대의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생태운동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의 표현이다." 강 기자는 정말 성실하고 진지하게 '민주주의'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 '생태담론' 전체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녹색평론'은 오랫동안 "세계화와 개발에 맞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기여하기 위해 골몰해왔다. 그것은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껍데기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중의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이었으며, 현실의 대의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극복되고 넘어서야 할 과제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강 기자의 표현대로라면 "생태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 "실질화, 토착화"시켜야 한다는 "민주주의" 즉 대의 민주주의가 바로 지금 "새만금사업"을 강행하여 540홀짜리 골프장을 만들어 그 알량한 '경제'를 회생시키겠다고 하고 있으며, 국민 대다수의 "파병반대" 여론을 외면하고 '도둑파병'으로 미국의 침략·학살 전쟁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아나키스트인 박홍규 교수가 생각하는 "정치적 민주화"와 "생태운동"과 아나키즘의 관계도 참으로 요령부득이 아닐 수 없다. 

  공교롭게도 강 기자가 이 기사를 쓰기 직전 펴낸 '녹색평론' 제78호(9-10월호)의 좌담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비록 부족하나마, 바로 이 '민주주의'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 좌담의 결론 가운데 한가지를 조금 거칠게 요약하자면, "산업화와 개발 자체가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를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성장의 논리, 부국강병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진정한 민중의 평화와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박정희가 민주주의와 인권은 훼손했지만 그래도 경제성장을 이룬 공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우리사회, 특히 주류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는 정당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박정희가 이루었다는 산업화와 그 바탕이 된 경제성장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를 철저히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그러한 성장 패러다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는 지금의 정치권력과 지배 엘리트들, 그리고 지식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박정희 시대의 계승·발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이번 호 '녹색평론'에서 새삼스럽게 제기된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녹색평론'의 보잘것없지만 끈질긴 그 동안의 작업은 '진정한 민주주의', 다시 말해 '풀뿌리 민중의 자치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기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는 것을, 여기에서 편집장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구차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이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토론, "논쟁다운 논쟁", 소위 '생태담론'의 진전을 위한 노력은, 적어도 그러한 '녹색평론'의 작업에 대한 성실한 검토와 정당한 평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교수신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강성민 기자의 기사는 '착각'과 '오독', '불성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야만적인 횡포이자 폭거에 가깝다. 이런 기사를 통해 '한국 생태담론의 현실'을 운운하거나, 그것을 계기로 지성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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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금영 2005-02-16 20:50:26
거대담론의 구호속에 쏟아지는 환경담론, 결코 실질적 대안일 수 없습니다. 이제는 진정 건전한 생태담론을 이야기해야 할 때!

이동희 2004-09-25 00:44:44
강성민 기자의 불성실한 보도 태도와 기만적인 글쓰기는 예전부터 독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거나, 아니면 어디로든 떠나주시길..